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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위 시복 50주년 기념 특별기획 순교혈사] 45. 복녀 이아가다 김데레사 / 최석우 신부

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
입력일 2020-01-28 13:49:40 수정일 2020-01-28 13:49:40 발행일 1976-04-04 제 1003호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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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순교자 집안의 딸로 교수형 받아
이아가다-추잡한 옥리 틈에서 정절 지켜 17세에 순교
김데레사-비천한 종살이 마다 않고 즐거이 소임 다해 
기해년 11월 24일(12ㆍ29)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한 최베두루 현분다 정엘리사벳 등 일곱 분의 순교 행적을 그간 6회에 걸쳐서 다 보았다.

이들의 처형이 있은 다음 그때의 우의정 조인영은 다시금 궁지에 빠졌다. 척사 윤음을 반포한 이상 박해를 세 전에 마감해야 하겠는데 그러나 일이 뜻대로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배교하지도 않는 교우를 놓아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형 집행을 공식으로 자주하는 것은 더욱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궁여지책으로써 교우들을 가능한 한 비밀리에 감방에서 목 졸라 처치하라는 교수령을 거듭 시달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많은 교우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불행히 배교자가 잇달아 나왔으나 순교자도 적지 않았는데 섣달 한 달 사이에 약 15명이 그들의 신앙을 용감히 증거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복자가 된 이는 오늘 얘기하려는 이아가다와 김데레사 등 네 명에 불과했다.

이아가다는 순교자 부부 이아오스딩과 권발바라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거룩한 표양을 따라 충실히 수계하였고 일찌기 동정을 지킬 결심을 하였다.

이미 기해박해 초에 부모와 함께 잡힌 아가다는 포청에서 배교를 거부하자 부모와 한가지로 형조로 옮겨졌다. 형관이 우선 좋은 말로 달래도 보고 다음 가혹한 형벌로 위협해 보았지만 사람이 아니요 괴물이라고 기이하게 여길 정도로 확고부동하였다. 그러나 나라에서 나이 어린 것의 목을 베는 것을 금한다는 것을 핑계로 삼아 아가다를 포청으로 도로 돌려보냈다. 아가다는 부모와 한사코 생사를 같이 하겠다고 눈물로 호소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하루는 포장이 아가다에게『네 부모가 배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하지만 아가다는 동생과 함께『부모님이 배반을 했거나 안 했거나 그것은 우리가 알 바가 아닙니다. 우리로서는 늘 섬겨온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아버지가 순교하고 이어 숙부 그리고 어머니가 차례차례로 순교하였다. 무엇보다도 부모님이 순교했다는 소식은 아가다의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실로 아가다의 인내와 용기에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옥중에서 아홉 달 이상이나 주림과 추위 갈증과 염병으로 겪어야 했던 온갖 옥고 외에도 아가다는 삼백 대 이상의 태형과 90대 이상의 곤장을 모두 끝까지 이겨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비록 추잡한 간수들의 손아귀에서도 천주의 도우심으로 홀로 그의 정결을 지킬 수 있었다』는 기록은 또한 아가다가 그의 정결을 수호하기 위해 음탕한 간수들과 투쟁하여야 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결국 12월 5일 김데레사와 함께 굥수형을 받고 순교하니 아직 나이 겨우 17세의 소녀였다.

김데레사는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 순교하였다.

아버지는 순조 15년 을해박해(1815)시 안동에서 잡혀 이듬해 대구에서 참수 치명한 김종한(안드레아)인 것이 거의 틀림없다.

그의 고향은 바로 김대건 신부의 고향이기도 한 면천의 솔뫼였다.

본시 부모가 열심한 교우였으므로 데레사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교훈을 잘 듣고 자신도 열심히 봉교하였다. 어머니를 여의게 되자 집안이 가난해서 이태 외가에 붙여 자랐다.

원래 수정할 뜻은 있었으나 아버지가 결혼하기를 명하므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열입곱 살 때 한 교우에게 출가하였다.

동거생활 15년에 자녀 여럿을 두었으나 남편이 잡혀 순교하였다. 달레에 의하면 해미에서 신앙을 위해 옥사한 손영욱(요셉)이 바로 데레사의 남편이었다고 한다.

과부가 된 후에도 비록 살림이 비참하고 가난하였지만 수절하며 정결한 덕행으로 모든 교우의 모범이 되고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매일 같이 겪어야 했던 궁핍에 만족하지 않고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 꼭 대재를 지켰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며 늘 자신의 허물을 간절히 뉘우쳤다.

얼마동안 서울 친척의 집에 와 있다가 다시 계모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때마침 중국에서 유 신부가 입국하게 되자 신부댁의 시중 들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교우들이 데레사를 최적임자로 추천하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로 불려와 정엘리사벳과 같이 신부댁 살림을 돌보게 되었다. 데레사 는 이 비천한 종살이가 자기 신분에 저촉됨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을 뿐더러 겸손하게 또 즐거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하니 모두가 그의 겸손에 탄복해마지 않았고 유 신부 자신도 데레사를 칭찬하였다. 유 신부가 떠난 후에도 데레사는 정엘리사벳을 따라 주교댁에 와서 시중 들고 있었다.

데레사는 본디 치명할 원의가 간절했다. 그래서 박해가 일어나자 시골로 쉽게 피신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엘리사벳과 같이 치명하고자 피신하기를 거절하고 체포를 기다렸다.

소원대로 6월 9일 정하상 일가와 함께 붙잡혔다. 문초 때마다 태장을 50대씩 치며 배교하라, 일당을 대라, 신부에 관한 사정을 말해라 하며 엄명했다. 이렇게 여섯 번 문초에서 총 280도의 대창을 맞았다.

그러나 데레사는 인내와 용기로 이 모든 혹형을 극복하고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재옥 7개월 후 교수형을 받고 44세로 자신의 순교를 완성하였다.

(계속)

최석우 신부ㆍ교회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