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그리스도의 교회는 오늘날 전 인류가 극적인 방법으로 추구하고 있는 자유를 향한 거대한 열망을 자신의 열망으로 삼고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죄로부터,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시어 완전한 자유의 시대를 선도하고 계시다. 그렇다. 주님의 영이 있는 그곳에 바로 자유가 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 32)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신앙교리성은, 진리를 따르지않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다는 사실을 각성하며 이 훈령을 준비했다. 이는 전에 발표했던「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관한 훈령」-자유의 전갈(Libertatis Nuntius)에서 이미 약속한 바를 이행하는 것이며 근본적으로는 그 훈령의 의도와 일치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앙교리성은 자유와 해방에 관한 그리스도교 교리의 이론적ㆍ실천적 측면을 긍정적인 양태로 진술하고자 한다.
1. 현대세계의 자유상황
자유를 향한 열망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한 「시대의 징표」이며, 이는 극히 명확한 표징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징표가 오로지 현대 세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문예 부흥과 종교 개혁은 이 자유를 향한 열망을 드러내었고, 이 열망은 계몽 운동과 프랑스 혁명에서 그 절정에 달했었다. 그 이후, 역사는 우주적 차원의 진정한 실재적 해방으로서 인식되어 왔다. 인류는 마침내 구체적이고도 완전한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현시대는 인간의 해방을 세가지 영역에서 약속하고 있다. 즉, 자연의 지배력으로부터의 해방, 정치적ㆍ사회적 불의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지성과 의지가 모든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개인의 해방이다. 이러한 목적을 추구하는 그 도정은 의심할 여지없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고 있다. 그러나 이 해방의 모든 영역에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기보다는 오히려 부각되어 왔다는 것을 숨길 수는 없다.
자유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억압당하고 있으며 새로운 위협을 받고있다. 왜?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느님과 도덕으로부터 인근을「해방시킨다」는 현대의 거짓 주장을 교회는 끊임없이 비난해왔다.
교회는 아마 자연과학과 기술 및 경제적 측면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성과를 너무 더디게 인정해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자유의 근본 차원으로서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윤리를 모호하게 하거니와 부정하려는 어떠한 역사적 진보도 한갓 편린에 지나지 않으며 비참한 귀결에 이르고 만다는 사실에 대하여 교회는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왔다.
역사의 이 새로운 시대에서 교회는 진정한 해방 즉 사회도덕과 구원이 조화 일치를 이루는 온전한 해방을 추구하는 길의 모색을 촉구한다. 이러한 해방의 추구에 기여하고자하는 것이 바로 이 훈령의 의도이다.
2. 자유를 향한 인간의 소명과 죄악의 비극
자유란 무엇인가? 오늘날 이 물음에 대한 일반적인 답변은 자기가 원하는데로 외부의 어떠한 구속을 받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우리 각자는 인간이란 자기가 성취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바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존재는 유한하고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존상황은 의지와 본성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에는 자멸에 이르고 만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그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서,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는 우리들에게 현실적인 욕구를 가지라고 가르친다. 오로지 진리와 정의 안에서, 인간의 자유는 선과 행복을 향해 나아간다. 진리와 정의만이 자유의 척도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으며 하느님께 대한 의존에서 자유가 고양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재앙만이 뒤따를 뿐이다. 이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현대 무신론이 일삼는 거짓말이다. 인간에게 하느님의 자리를 약속하는 그러한 허언은 매혹적으로 들리겠지만, 파멸에 이른 거짓이다.
해방은, 그것이 진정한 해방일 때에,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나누어 받은 그 자유의 개념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해방은 진정한 인간 자유의 실천이 요구하는 조건을 보장해주고 증진시키고자 하는 열망 계획 행동 투쟁 고통 시련들의 거대한 집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는 주어진 것이다. 자유를 실천하게 하고 신장시키는 해방의 과정 그 발단에서부터, 사실 자유는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의 자유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자유인가?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부터 새로운 형태의 예속이 나타나고 해방의 도정마저 억압의 과정으로 변질되는 그러한 자유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변하지 않고는 현실적으로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없다. 우리들의 신앙은 악이란 자유가 아니라 오직 죄안에 있다고 가르친다. 하느님과의 관계단절이 인류 계속적인 실패의 원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죄의식이 모호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자유의 본질 그 자체로 되돌아가 인간이 자유를 사용하는 데에서 바로 죄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자유를 향한 갈망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본질자체를 부정하려는 유혹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고자 하며, 하느님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창세3, 5참조). 자유를 왜곡하는 이러한 지속적인 유혹이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죄는 진리의 부정이다. 죄란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하여 인간은 결국 속아 넘어가 자기 소외에 빠지고 만다.
이러한 죄의 결말이 개인의 내부 균형 붕괴이며 사회의 혼란이다. 죄의 절정인 최악의 무질서는 우상숭배이다.
인간 공동체의 모든 분쟁과 탈선은 우상 숭배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무한을 향한 자신의 갈증을 채우기 위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안에서 그 해답을 찾지 않고, 인간 스스로를 들어 높이기 위하여 모든 참조와 모든 피조물들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이 엄청난 거짓으로부터 착취와 예속의 구조가 나타난다.
3. 해방과 그리스도인의 자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창조물을 버려두지 않으신다. 죄에 물든 역사가 인간을 절망의 벼랑으로 밀어불이게 하지는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약속을 성취한다. 복음은 자유의 전갈이며 해방의 힘이다.
하느님은 해방자이시다. 그분의 해방활동은 이미 구약성서 안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출애급은 모든 해방의 전형이다. 야훼께서는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예속으로부터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셨다. 그러나 그분의 목적은 한층 높은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시나이 산의 계약을 통하여 그들을「사제들의 나라, 거룩한 백성」(출애19, 6)으로 삼고자 하셨다. 출애급을 일으키고 이를 해석하는 종교적인 전체 구조에서 정치적인 측면을 배제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출애급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 완전한 의미를 얻게된다. 이것이 교회가 출애급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그때가 충만하여, 아브라함의 백성과 모든 민족들은 영적이고도 보편적이며 하나인 하느님 백성을 이루도록 부름받았다. 이는 인류 역사의 새로운 시대이다.
예언자들은 이러한 구원의 약속을 성취시키는 그 길을 닦았다. 예언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억압과 불의를 거슬러 소리 높이 외친다. 불의와 억압이 계약의 법 그 자체를 짓밟기 때문이다.「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은 시편 안에서 하느님께 탄원을 올린다. 그들은 온갖 비참과 불의를 열거하면서도, 가장 무서운 죄악이 하느님과의 친교 상실이라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정의를 위한 투쟁이 곧바로 죄에서의 해방을 향한 열망과 기도가 되는 이유이다. 신약성서의 첫머리에서도「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이 맨 먼저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다리며 살아온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스바3, 12~20참조)로 나타난다. 이 간절한 희망의 화신인 마리아는 기쁨에 가득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려 하신다는 소식을 전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포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스스로를 가난하게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다. 철저한 순종 안에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으며, 결정적인 해방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셨다. 이러한 해방을 우리는 교회의 성사들을 통하여 체험하고 있다. 인간을 의롭게 하는 이러한 성사의 은총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한다.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이웃 사랑의 근원이다. 어떠한 한계도 없는 이웃 사랑은 원수와 박해자들까지도 포용한다. 이러한 사랑은 정의를 요구할 뿐 아니라 동시에 자비를 안고 있다.오직 자비만이 정의를 보복으로부터 막아주는 것이다.
완전한 해방을 향하여 나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길은 사랑의 법으로 지켜진다.
그 목적지는「하느님께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묵시21, 4) 새로운 예루살렘이다. 그 분명한 목적이 진리와 사랑 안에서 이 지상 도시의 진보를 이룩하려는 결의를 강화시킨다.
4. 교회의 해방사명
정의를 추구하고 정의에 관하여 발언하는 것은 분명히 교회의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교회의 사명 특히 평신도들의 사명이 한갓 현세적인 과업으로 격하되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 그러나 복음의 선포는 세계 전체와 지상의 모든 현실에 빛을 비추고 있다.
교회가 억압과 예속을 고발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자기 사명을 저버리는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을 이방인으로 대하는 사회생활의 새로운 형태를 거부해야만 한다.역사를 비추는 진리의 말씀을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셨고 또 고통받는 사람들과 더불어 일치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교회는 그러한 과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산상설교에 나오는「참된행복」은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 역사의 궁극목적에 비추어, 그「참된행복」은 현세질서의 정의의 토대로서 더욱더 명확하게 인식되어 왔다. 사실「참된행복」은 초월 질서를 배경으로 하여 정의와 그 기능을 밝혀주고 있다. 이것은, 현세질서 고유의 일관성을 저하하지 않으면서 구원 계획안에서 정의에 그 올바른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다.
스스로 가난하게 되시어 당신의 가난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던 그리스도께 대한 기억, 그분의 모범과 제자들의 표양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최우선적 사랑에로 교회를 부르고 있다.
인간의 불행, 그 물질적 정신적 형태의 비참-착취, 억압, 질병, 노령, 즉음 등-은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명확한 징표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교회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교회의 무수한 자선 사업이 이를 증명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교회는 소유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 때문에 가지는 인간의 존엄성을 증거하고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사랑하는 것은 어떠한 차별이나 분파와도 거리가 먼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보편적 사명을 보여주며,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러한 까닭에 기초 공동체와 운동 단체들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사랑의 초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5. 그리스도인의 해방실천을 위한 교회의 사회교리
해방의 윤리적 사회적 차원은 그 구원적 차원의 귀결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현세적 측면으로 영락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를 되돌려 주시며, 사랑의 계명을 이행하고 모든 상황에서 이 사랑을 실천하라는 의무를 부여하셨다. 이 사랑의 계명이 그리스도교 사회 도덕의 기초이다. 교회의 사회교리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정의와 사랑이다.
복음의 메시지에서 나오는 이러한 교리는 인간적인 지혜와 학문의 자료를 원용한다. 이 교리는 반성원리, 판단기준, 행동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 목적은 불의와 비참을 제거하고, 사랑의 문화를 증진시키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이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은 권리와 더불어 의무를 수반한다. 사회교리의 두가지 토대는 연대성의 원리와 보조성의 원리이다.
연대성의 원리는 교회로 하여금 모든 형태의 개인주의를 반대하도록 하며, 보조성의 원리는 집단주의를 배척하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근본 기준들은 체제에 대한 인간의 우위를 천명하고 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정확한 행동방향이 제시된다.
-자유를 향한 교육이 필요하다. 자유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 곳에, 진정한 해방은 있을수 없다.
-해방에 필요한 수단이라고 하여 조직적인 폭력에 의존하는 일에 대해서는 단호히『아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폭력이 종식되어야 한다고 천명한다. 교회는 권력 체제에서 자행되는 온갖 형태의 불의와 정치적 억압을 단죄한다. 권력이 남용되고 있는 상황에 직면하여, 교회는 공권력의 피동성을 용인할 수 없다.
-교회는 계급투쟁 안에서 사회생활의 구조적 역동성을 찾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실, 그러한 이론은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역사의 거짓「법칙」에 인간을 종속시키는 것이다.
-교회는 더욱 인간다운 사회건설의 충분조건으로 불의한 체제의 타파를 내세우는 혁명의 신화를 배척한다.혁명은 개혁의 수단에 대한 가치를 격하시키며, 전체주의 체제의 토대를 마련해줄 뿐이다.
-중대한 불의에 직면해있는 일부 상황은 과감하고도 근본적인 개혁을 요청하고 부당한 특권의 철폐를 요구하고 있으나, 어느 누구도 부당한 범죄적 수단을 이용해서는 안된다.
교도권에서 명백하고도 지속적인 폭정을 종식시키는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투쟁을 고려하였다 하더라도(민족들의 발전 촉진에 관한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31항참조), 상황의 철저한 분석 이후에만 이러한 원칙의 적용을 제안할 수 있다. 지속적인 기술의 발전과 폭력의존에 내포된 위험의 증대에 비추어, 오늘날 「무저항」이라고 일컫는 바가 도덕의 원리를 지키고 성공을 약속해 주는 훌륭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전세계 도처에서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하고 있는, 정의를 향한 간절한 부르짖음에 직면하여, 교회는 모든 신자들(특별히 평신도들)에게 그리고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 노동의 문명을 건설하고, 연대성을 증진시키며, 모든 인간의 문화향상을 촉진시키라고 촉구하는 바이다.
-나자렛 사람 예수의 실존에 근거한, 「노동」의 복음은 창조화 구원의 신비에 비추어 노동의 고귀함과 풍요로움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노동은 모든 사회문제의 관건이다.
노동은 인간생활의 핵심이다. 그리스도교의 사회 교리는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를 옹호하며, 국가와 민족들의 공동선을 구현하고 증진시킬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영역에서 노동자들의 정당하고도 올바를 참여를 천명하고 있다.
역대성은 인간적 초자연적 형제애로부터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필연성이다. 개인들 사이에, 집단간에, 궁극적으로는 민족들간의 상승차원에서, 연대의 강화가 진전되어야 한다.
부유한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에 대하여 명백한 책임이 있다. 이 책임은, 모든 사물이 지니는 궁극 목적의 원리는 물론 연대성의 원리에서 비롯된다. 정의는 이러한 책임을 요구하며, 남북간의 무역관계 개선을 그 과업으로 부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위대한 문화의 개방이 절대 필요하다. 문화는 인간이 더욱 인간답게 되는 길이다. 세계의 구원을 위한 자신의 사명안에서, 교회는 이 위대한 과업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초대하고 있다. 이러한 선교의 역동성 안에서, 교회는 다양한 문화의 진정한 가치들을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과 융화시키는 토착의 오랜 전통과 융화시키는 토착화의 도전을 받아들이라고 제안한다. 그것은 진정한 문화가치로의 변모이며, 인류의 문화속에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심는 것이다.
맺음말
구원의 역사는 죄악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 자녀의 자유에로 들어가는 인류의 역사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전형이요 교회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만난다. 가난한 사람들이 십자가의 구원신비를 예리하게 이해하는 까닭에, 가난한 사람들은 마리아를 무한히 신뢰하고 있다. 복음화와 인간 발전에 헌신해야 하는 사목자들, 사제들, 수도자들, 평신도들은 특히 단순하고 무력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느님 백성의 이 특별한「신앙의식」을 고려하여야 한다. 신앙인들이 이러한 신앙의식을 자기 것으로 삼도록 도와주는 일은 교회의 종을, 특히 신학자들의 책무이다.
해방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오늘날의 역사안에 현존하는 구원신비의 진리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써 구원받은 인류를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로 이끌어갈수 있다고 교회는 대답한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에서 비롯되는 완전환 해방이며,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해방을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에 의미를부여하는 것이다. 해방을 향한 그 모든 노력이 죄악에 대한 또 다른 예속의 사슬로 변하지 않도록 지켜주는것은 오직 진리이다.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