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문인들이 엮는 납량수필] 봉숭아는 손톱꽃, 오호, 이 여름엔 그것이나 보리!

김수남
입력일 2019-10-14 10:02:46 수정일 2019-10-14 10:02:46 발행일 1987-07-05 제 1562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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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용이 없으니「타가용」이라도 집어타고 피서를 떠나고 싶어도 난세의 이 여름을 만나 죄를 짓는 기분이 먼저 들어…

지난 겨울에는 달팽이 집에 들어앉아 가슴 팍에 베개대고 배를 깔고 엎드려서 낮마다 밤마다 끙끙 소리도 드높게 원고지를 울렸으니, 딴에는 꿍꿍이 속셈이 있었었다. 불후의 명작은 언감생의 그만두고 더도말고 덜도말고「썩을 소설」하나쓰자, 바로 그런 뜻이 아니었겠는가.

궁형(宮刑)당한 고자처럼 사기 (史記)지은 사마천의 자존심을 흉내 내듯 무딘 붓 끝을 몸살나게 닦달하여 천 몇백장 원고지를 메웠으니, 칼이 됐든 붓이 됐든 휘둘러 끝장을 보았다면 사바세상 대장부가 한 몫은 했으렸다. 스스로 위로하고 고소를 머금은 바 있었더니 오호라, 벌써「염제(炎帝)」가 진노하여「사악한 불더위」를 내리는구나.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이 여름을 어찌할거나, 이 여름엔 그저 뜨락의 꽃이나 바라볼진저! 그러나 작은 꽃조차 그렇게 보아 그러한지 또한 그렇구나!

무슨 죄를 그리지어 천형(天刑)을 입었는지 채송화는 하늘을 우러르지 못하고, 마당기고 땅을 기어「땅꽃」소릴 듣는구나. 무슨 한이 그리 많아 이승살이 고달픈지 봉숭아는 핏빛으로 손톱속에 배어든다.

당당한 듯 솟았으나 벼슬 들고 우는 모습 틀림 없는 맨드라미. 조선의 수컷들이한 여름을 우는건가.

채송화는 뜸북꽃/봉숭아는 손톱꽃/맨드라미 울어라, 벼슬들고 울어라/채송화는 꼬마꽃/봉숭아는색시꽃/맨드라민 총각꽃,봉숭아를 사랑해.

늦심은 나팔꽃은 아직 한자도 못자랐으니, 자칫하면 울어대는 역사의 개선행진곡을 여름 끝에 들을는지 능소화 당황 빛도 심상찮게 필듯하고, 청포도 푸른 알알도 한이 맺혀 영글 듯,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이 여름을 어찌할거나. 해마다 해마다 꽃은 피어 서로 비슷하건만 올 여름 이꽃들은 범상치가 않구나. 송이 송이 망울마다 통곡을 품었구나.

시절이 하 수상하니 써놓은 글도 한권 서책으로 낼동 말동 하여라, 고 인심이 하 비상하나 이 여름 무더위가 더더욱 덥겠구나. 그러기 어찌 보낼건가, 이 여름을 어찌 보낼건가.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라매, 매란 매는 죄다 길들이지 못해도 그 중에 하나 수진이 한마리를 왼손팔뚝에 얹은 채로「멍멍군자」를 앞세우고, 적막청산 이곳저곳 기웃하는 매 사냥도 좋겠지만. 돈 안드는 말이라서 내뱉어본 객담이지될 법이나 한 소린가. 자가용이 없으니 「타가용」이라도 집어타고 명산대천을 발길질하는 것도 그럴듯한 피서련만 요순시절 태평시에도 벼르기만 했던 것을 난세의 이 여름을 만나 그짓을 한다하면 어쩐지 저쩐지 죄를 짓는 심정이라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죽어라고 어찌할거나.

한때 한때 운동을 좋아하여, 하는것 보는 것을 더불어 즐겼으나 「바보상자(TV)」에 얼이 빠져 인생을 탕진함은 고백성사감인 듯하여 삼가 근신해야겠고 이 여름날 일이 큰일은 큰일이로되 아무래도 떡도 못해먹을 큰일로다. 작년 그러께 연 두해를 바다 한번 못갔으니, 올 여름도 건너뛰면 자식들의 노기 (怒氣)가 또한 비상할 터인 즉, 바지로 살 가리고 다니는 가장(家長)된 꼴값에 터무니없이 금족령 계엄령을 발동하여 온 식구를 연금할 수도 없는 일 어찌할거나, 이 여름의 납량(納凉)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니 어찌한단 말인가!

만권의 책을 지향함은 난세를 구할 방략을 얻고자 함도 아니지만, 어지러운 세상에 굴절이 심한 햇빛을 잘 쐬지못하여 얼굴 헌연일개 범부 백면서생이 이제껏 몸으로 익힌바가 작해야 책속의 먼지를 눈터는 것뿐이니 취미가 미미하고 척박하다 탓하자를 말지어다. 시름을 삼키고 노여움을 삭이고 억지춘향일망정 맛있게 읽는다면 이또한 난세의 납량이 아니겠는가.

힘도 없고 돈도 없는 못난 남편을 요셉처럼 받들어온 또한 못난 아내에게 삼가결례(缺禮)를 간구한 뒤 한바가지 냉수를 삭신에 퍼부어 울화를 진정하고 속곳바람으로 댓자리에 꿇어앉아, 이여름, 이「천년보다 더 길 여름」엔 한권책을 읽을란다.

그러면 오장육부의 심화(心火)를 식힐 몇 구절은 있으렸다.!

「걸ㆍ주」는 어찌하여 「탕ㆍ무」에게 말했으며 시황제의 서불은 불사약을 구했는지, 성했던 김 시습의 미친짓이 웬일인지, 읽다보면「다산」의 목민심(牧民心)도 나오겠지. 읽다보면 책속에서「찬 바람」도 날것이다.

그래도 이 여름이 무덥다 여겨지면 함무제의 「추풍사」를 읽어서 가을바람을 쐬리라. 그리하여 조금참고 많이 참아 이 여름을 이겨내면 멀지않아 귀뚜라민 서럽게 울 것이다.

귀뚤뚤 귀뚤뚤 메아꿀빠 메아꿀빠 내 탓이오로 울는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으로 울는지, 어쩌면 대오각성 열반의 소리로 울는지, 그 누군들 알기야 하겠는가만, 성급한 여름 귀뚜라미라도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소돔의 여름 또한 가리니!

그도 조급하여 참지를 못한다면「봉숭아는 손톱꽃」그 핏 빛을 보면서 맨드라미 수탉처럼 붉게 붉게 타오르리.

죽어서「황천(黃泉)」엘가면 물놀이가 되겠고, 죽어서「연옥(煉獄)」엘 가면 불놀이가 될 것이니, 티끌 같은 이승의 목숨에서 피서다 납량을 따져서 무엇하리!

그러나 이 여름, 최루(催漏)의 더위를 어찌할거나, 어찌할거나!

▲196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조부사망급래」당선 ▲작품(집)에「유아라보이」「달바라기」「10초F」「개똥지빠귀가 우는 것은 슬퍼서가 아니다」등등 ▲현재 대전성모여고 재직.

김수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