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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실종된 평화를 찾습니다”/이윤자 취재국장 대우

이윤자 취재국장 대우
입력일 2018-12-10 04:23:00 수정일 2018-12-10 04:23:00 발행일 1991-01-01 제 1736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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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참 좋은 말이다. 언제 들어도 푸근하고 기분이 좋다. 만일 인간사회에 있어 이 말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평화라는 말이 없다고 평화 그 자체가 없어지거나 뜻이 변질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언어가 그러한 듯이 표기의 방법이 다를 뿐 평화는 평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아마도 평화는 인간의 출현과 더불어 발생된 개념일지도 모른다.

평화라는 낱말의 생성은 필요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평화가 없기 때문이며 평화가 요청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악과를 따서 먹음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깨뜨리고 하느님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은 아담과 에와 이래 평화에 대한 갈구는 인간의 주변을 떠나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인간의 첫 소산물, 카인은 반평화를 선두주자가 된다. 그로부터 실종된 언어 평화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인간을 괴롭히며 동반자의 역할을 맡아왔다. 비관론자들은 평화란 이 세상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파라다이스의 언어일 뿐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어느 시대였든지 비평화 반평화의 그늘은 있게 마련이었고 인간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비평화적인 방법을 서슴없이 너무나 자주 사용해왔다. 폭력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된 방법 역시 폭력이었고 전쟁 역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아래 반복을 거듭해왔다.

기름값을 하늘위로 끌어올리고 모든 물가를 춤추게 한 석유 파동 역시 아이러니컬하게도 평화라는 단어와 맞물려 있다. 쿠웨이트를 공짜로 날름 삼켜버린 사막의 무법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의 국가탈취의 변이 바로 평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점한 부를 나눈다는 측면에서는 언뜻 그의 주장이 맞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세계 평화유지의 대부로 군림해온 똑똑한 미국이 착각 속에 빠져있을 리 만무하고 평화는 다른 옷을 입은 채 또 다른 명분으로 무장한 평화와 대치를 하고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멀리까지 갈 것도 없다. 실종된 평화의 현장은 우리 주변 곳곳에 있다.

친아버지가 딸아이를 팔아넘기는 몹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을 생매장하는 비인간적 사회집단이 우리가 숨 쉬는 이 땅위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다. 이름도 망측한 폭력조직이 밝은 대낮에 칼자루와 도끼를 휘두르는 험한 세상이 바로 우리의 것이다. “자는 마누라 다시보자” 얼마 전부터 등장한 이 우스갯소리는 술자리의 분위기를 돋우는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새겨들을수록 끔찍하기만 한다. 어제 어디서 인신매매단에 잡혀 갈지 모르는 사람들은 어린이에서부터 여중생 여고생 처녀 아줌마 등 한계가 없다. 어디 그뿐인가 멀리 외딴 섬에는 멀쩡한 사대부들이 잡혀가 새우잡이 등의 강제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으로 기막힐 뿐이다. 암울하고 아득하기만한 비평화의 요소 중에서도 분배의 비정의는 보다 암적인 존재로 우리 삶을 위협하고 있다. 가진 사람과 덜 가진 사람 그리고 아주 못 가진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어느새 놓여 버렸다.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온갖 무질서의 바탕에는 알고 보면 경제 질서의 파괴가 자리 잡고 있다. 불과 2~3년 사이에 부자와 빈자의 명암이 너무나 뚜렷이 드러나 버린 것이다. 올라간 집세를 감당 못한 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비극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 것도 분배의 비정의가 저지른 엄청난 폭력의 산물이 아닌가.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그 대가를 정당하게 받고도 실망과 좌절감을 느껴야만 한다면 분명히 우리사회는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한 구석이 잘못되고 있다고 치부해 버릴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문제다.

정치는 정치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멋대로 가는 사회, 잘못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디에서부터 무너져 내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번 생각해보자. 이렇듯 우리의 모습이 추악해본 적이 있는가. 수천만원대의 가구를 사탕 한 봉지 사듯이 사고 또 갈아치우는 사람들, 어린아이 손에 10만원짜리 수표를 들려 내보내는 철없는 엄마들, 천만원이 넘는다는 털코트를 입고 집 한채를 두르고 다닌다(이미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는 비아냥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멍청한 여자들, 몇백만원짜리 외제신사복을 손수건 갈아대듯 바꿔 입는 뻔뻔한 남자들이 함께 사는 한 우리세상은 평화가 자리할 공간은 없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에 오히려 극성을 부리는 범죄는 전쟁으로 범죄를 완전히 잡을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만일 전쟁을 벌여 범죄를 잡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매일처럼 전쟁을 벌여야만 할 형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평화를 찾는 것이다. 전쟁이 아니라 양심의 회복으로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양심이란 것이 있기에 인간은 인간으로 행세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양심, 어두운 땅속에 꼭꼭 묻어버린 양심, 헐값으로 팔아넘긴 양심들만 되살아난다면 이 세상이 그렇게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선택은 오직 하나다. 내가 먼저 내팽개친 나의 모습을 찾는 일이다. 인간에 대해, 생명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폭력에 길들여지고 범죄에 무감각해진 나로부터의 탈출, 더 망설일 시간이 우리에겐 없다.

91년 새해는 내가 평화의 중심이 되자. 오직 평화만이 이 땅에 발붙일 수 있도록 하자. 그것만이 우리가 더불어 사는 길이다.

이윤자 취재국장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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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자 취재국장 대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