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이 살아계실 때 느꼈던 것보다 돌아가시고 나서 “역시 큰 사제였구나”하는 것을 깨달았다.
10월2일 운명하시고 장례를 치를 때까지 그렇게도 많은 사제 수도자 교우들의 행렬이 대흥동 주교좌성당을 가득 메웠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장례를 치루고 나서 신부님이 차지하고 계셨던 그 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지는데서 더 절실히 그런 걸 깨닫게 됐는지도 모른다.
지난여름, 신부님을 대사동 사제관으로 찾아뵈었을 때의 일이다. 자연히 화제가 바둑에 얽힌 추억담으로 옮겨졌다. 당신께서 이길 때까지는 상대방을 놓아주지 않던 일, 한 수 잘못 놓아 물러달라면 절대 안 되고 당신은 무르시던 일….
그렇게 곧잘 밤이 깊도록 바둑을 두던 생각에 나는 “신부님, 어서 회복하셔서 바둑을 또 두셔야지요”하고 말씀드렸다. 그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비쳤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노!”하고 정색을 하시며 “내가 걸린 암은 복암이야. 요즘 교통사고나 재해로 얼마나 많이 죽나. 갑자기 죽음에 대한 준비도 없이 죽는 걸 생각해봐. 그런데 나는 암에 걸려 미리 죽을 날을 알고 하늘나라에 갈 준비를 할 수 있으니 암이 아니라 복암이야. 그래서 난 그동안 신자들에게도 잘못한 것 있으면 용서해달라고 했어. 그리고 이봐, 내 나이 60대야. 우리나라 인구 중에 60대는 13%밖에 안 돼. 그럼 많이 산 것이지, 서운할 것 없어. 또 사람은 살다 죽어야지 안 죽고 모두 살아봐. 지구가 폭발할거야. 죽는 것 그건 자연법칙이고 하느님 뜻이네. 여기에 순명해야지 오래 살게 해달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거야. 나를 위해 기도하려거든 오래 살게 해달라고 하지 말고 평안히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오케이?”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신부님은 나에게 둔산에 성당 하나 잘 지어보라며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셨다. 뵈올 때마다 병세가 악화되시는 신부님을 마지막으로 찾아뵌 것은 9월 하순 신부님께서 깊이 관여하셨던 논산의 중증 장애자를 위한 ‘성모의 마을’ 기공식 행사를 앞두고서였다.
그때도 담담하게 남의 이야기하듯 자신의 병세를 설명하면서 “이제 많이 살아야 며칠이다”고 털어 놓으면서 지금 고통을 생각하면 어서 죽고 싶다고 하셨다. 듣기에도 괴로운 말씀이었다. 그리고는 그 고통 속에서도 성모의 마을이 중증 장애자 시설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범이 되도록 당부하셨다.
그런데 신부님은 생각한 대로 며칠이 지나기 전에 추석 연휴가 끝나는 날 아침 홀연히 하늘나라로 가신 것이다. 임종을 지켜본 분들은 신부님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평화롭게 운명을 하셨다 한다.
정말 신부님은 큰 목자이셨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제이셨다.
‘노’와 ‘오케이’를 잘 사용하시듯 모든 언행이 분명했고, 꾸밈없이 순수함으로 인생을 살았으며 특히 군에 계실 때는 열세이던 가톨릭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놓은, 그래서 지금껏 군지휘관들 중에 가톨릭 신자가 많이 나오는데 기여하셨다.
권력 앞에서도 ‘노’라고 거침없이 발언을 하여 주목의 대상이 되기도 하셨다.
이제 신부님은 하늘나라로 가셨다. 우리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인의 생사관을 뚜렷이 심어주시어 위로하러 갔다가 위로를 받고 돌아오게 됐고 교회와 중증 장애자 등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주신 신부님!
하늘나라에 가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먼저 간 유진훈, 유경선 등 교우형제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실 거라며 평안한 얼굴로 말씀하신 신부님! 신부님 말씀대로 우린 눈물을 참으면서 이제 세상에서의 수고를 멈추시고 고통도 슬픔도 없는 하늘나라에서 영생을 누리시길 기도할 뿐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