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양한모 선생 영전에

구중서 베네딕또ㆍ수원대학교 문과대화장
입력일 2017-08-04 18:25:43 수정일 2017-08-04 18:25:43 발행일 1992-10-25 제 1827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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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평화안에 편히쉬소서”
신선한 기상과 큰 포용력으로 후진사랑
한국의 평신도신학 몸소 구현
양한모 아우구스띠노 선생님. 오늘 이 자리에서 선 생님은 영영 우리 결을 떠나고 계십니다.

70에서 갓 넘는 나이쯤은 요즈음 시속에서 한창 인생의 경실을 누리는 때 인데, 선생님은 어이 이리 아쉽께도 가십니까.

돌이켜 보면 우리 민족의 현대 수난사 복판에서 누구보다도 험난한 가시발길을 걸어 오시느라고 아마도 깊은 속 원기에 용혈이 드신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만년은 자상하고 평화한 삶이었습니다. 누가 선생님의 미소 띤 얼굴과, 늘 신선한 기상과, 가슴으로 끌어안는 포용에서 지난날의 험난을 느낄 수 있었겠습니까.

이같은 친화력과 젊은 기상때문에 선생님은 특히 젊은 후진들을 사랑하셨고, 그러하셨던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서 저와 같은 후진이 외람히 조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길에 있어서는 지각생이 없다는 말처럼,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이에게는 나이가 관계없다는 말처럼, 하느님의 전리를 생활하는 동안에 선생님은 교수 신부님들에게 형님이요 아버지같은 나이로 가톨릭 신학대학 과정을 공부하셨습니다. 크리스찬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집채같은 책더미에 묻혀 지내셨습니다.

이땅의 민주주의가 지지 부진하거나 오히려 크게 후퇴하기도 하던 어두운 시절에, 젊은 후진들은 깊은 밤에도 선생님 댁의 문을 두드려 술을 청해 놓고, 책이 없어서 무슨 일이 안 되느냐고 버릇없이 주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리에서 선생님의 표정은 오히려 미소 속에 흐뭇해지시는 듯 했습니다.

선생님은 묵묵히 이땅의 평신자 신학을 몸소 구현하시고, 천주교 조선교구 150주년 기념대회를 기획하고 지도하여 성공으로 이끄셨습니다. 이 행사의 성공이 한국 천주교 2백주년 기념대회와 세계성체대회라는 큰 행사를 잇달아 성공케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선생님은 조국의 민주적 통일을 누구보다도 열렬히 지향하시어, 우리교회의 북한선교회 활동에도 참여하셨습니다.

전망컨대 우리민족의 한결같은 염원인 조국의 통일도 그리 멀지는 않은것이 현실인데, 그 가슴 벅차는 날을 누구보다도 활개쳐 춤추실 선생님은 어이 눈을 감고 이대로 일찍 떠나신단 말입니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처럼 아쉬운데에 우리 인생의 진수가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그 수난의 삶에서도 자녀들의 훌륭히 일으켜 세우시고, 대통의 든든함을 목도하시는 속에서 떠나십니다. 누구보다도, 오늘 선생님의 영결을 알뜰히 갈무리하는 사랑하는 아내 홍윤숙 시인의 품속에서 조용히 쉬시듯이 가시는 것입니다.

1992년 10월 8일, 이 게으르고 우둔한 후진은 근래에 선생님이 가끔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고 하시던 데에 대한 예사로운 어림으로 세브란스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모처럼 종로복덕방에 들러 잣죽 무더기를 싸서 들고 병원에 들어섰지만 선생님은 이미 의식을 잃고 계셨습니다. 그 길로 선생님은 정든 장충단집으로 가족들과 함께 돌아오셨습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선생님의 오랜 수난사를 반분해 짊어지셨던 아내는 흐느낌 속에서 되뇌었습니다.『이렇게 이 길을 나 혼자 돌아갈수는 없는데…』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조만간 가야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 의 한 대목입니다.누구보다도 강인하시고 또한 천진하셨던 아우구스띠노 선생님,선생님의 세상 소풍은 바쁘셨고 또 아름다웠습니다.

가서 하느님의 평화 안에 쉬십시오.

구중서 베네딕또ㆍ수원대학교 문과대화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