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첫날부터 왠지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높은 벼랑위에서 낭떠러지에 떠밀려진 느낌이었습니다.
그와 나는 오리 길을 사이에 두고 살았는데 그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나는 원산서 공부하며 방학이 되면 가끔씩 만나는 사이였습니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교복 상의에 다른 색 바지를 입고 낭인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여고를 나와 있었습니다. 의과대학 입시에 떨어진 그와 결핵으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내가 만날 기회가 잦아지면서 서로 가까워졌습니다.
둘의 사이가 꽤 친밀해진 후였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그는 『나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니 그 이전에도 다른 여인이 있다는 말을 비춘 적이 있었으나 내가 무시해 버렸습니다. 노골적인 말투와 석연치 않은 태도에 불쾌해진 나는 헤어질 것을 다짐하고 물러났습니다.
그런데 잊으려야 잊히지 않은 채 괴로운 일 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이후 참으로 잊은 듯이 보이지도 않았으며 나를 멀리하고 있었습니다. 헤어지고 일 년이 되던 날 저도 모르게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에게 편지를 띄웠습니다. 너무도 뜻밖에 답장이 날아왔으며 우리는 전보다 더욱 친밀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대학에는 들어가지 못한 채인 그가 느닷없이 결혼을 하자고 했습니다. 그 당시 나의 집에서는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대학 출신의 사윗감을 물색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직업도 없고 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한 사람 쪽에서 청혼을 해오니 극구 반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님과 나의 아버님은 한 고장에서 서로 절친한 친구 사이였습니다. 반대하시던 나의 아버님도 인품이 고결하시던 분의 자식임을 믿고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시고 자식들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무리한 결혼을 자신이 서둘러서 해놓고 『결혼을 잘못했어.』하던 말 한마디는 이후 불신의 씨가 되어 내 마음속에 도사리게 되었습니다.
장녀에 이어 장남이 태어났습니다. 이때 남편은 징용을 피해 보통학교 교원이 되어 멀지는 않으나 집을 떠나 있었습니다. 토요일에 집에 와서 월요일 아침 집을 떠나기 전 새벽에 장남이 태어났습니다. 아들을 낳았다면서 몹시도 기뻐하며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토요일이 되어 돌아온 남편은 어쩐지 풀이 죽어 있었으며 꽤나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남편은 꺼내기 힘든 듯 한 어조로 말을 했습니다. 『○○○가 남산에 찾아왔었다. 그녀가 나를 배반할 줄 알았었는데 그녀의 부모님께서 우리들의 관계를 끊게 하려고 내 편지를 전해주지 않고 없애 버려서 오해를 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근원적인 문제는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상대가 의과대학에 들어가면 자신의 장래 문제를 굳히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여전히 대학에는 떨어지고 있어 머무적거리며 불투명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차대전의 와중에서 의과대학 합격은 더욱 치열해지고 불안한 초조가 겹친 남편은 그러한 그녀의 태도에 반발하여 나와의 교제를 시작했으며 성급한 결혼도 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