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화비용? 나눔비용!’ - 성슬기 수습기자
참기 힘든 쇼핑의 유혹…
더 많이 소비하면 행복할까
가난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서울역으로 가 주세요.”
동트기 전, 아직은 어둑한 오전 6시20분. 지방으로 출장 가던 날이었다. 대중교통으로 충분히 이동 가능한 시간이었지만 큰맘 먹고 택시에 올라탔다. 늦게 일어났다거나 몸이 피곤했던 건 아니다. 먼 길을 떠나기 위해 새벽부터 부산스럽게 준비한 나에게 선물하는 작은 위로이자 여유였다.
나에게 택시 뒷자석은 나른한 오후에 마시는 향긋한 커피 한 잔, 산 정상에서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 한 잔처럼 달콤했다. 그런데 가계부에 남아있는 금액을 보곤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헉! 생활비가 ⅓도 남지 않았다니!
견물생심.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자주 듣던 말이다. 사실 초등학교 때부터 구경하는 걸 좋아했다. 학교수업을 마치면 꼭 사지 않더라도 집 앞에 있는 쇼핑상가를 한 바퀴 정도 돌아야 집에 가곤 했다.
하지만 사순체험 이후 모든 걸 ‘돌’처럼 보기 시작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처음 열흘 정도만 그랬다. 이제는 매일 매일이 고비다. 오다가다 간식거리를 사고 마음에 쏙드는 옷이라도 하나 ‘지르는’ 순간 목표 금액을 초과 지출하게 된다. 그런데 참아내기 쉽지 않다.
‘주님, 저 마땅한 출근복도 없다고요!’
최근 일간지에서 ‘X발비용’이라는 신조어가 젊은층 사이에서 회자된다는 기사를 봤다. ‘울화비용’, ‘홧김비용’이라고도 하는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을 비용’을 뜻한다.
그동안 사용한 택시비가 어쩌면 이 비용일지 모른다. 나를 비롯해 꽤 많은 현대인들이 소비에서 행복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단 사실이다.
돈을 최대한 적게 써야하는 나는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기 시작했다. 행복은 대단하지 않은 곳에 있었다.
최근 전쟁으로 인해 고통 받는 시리아 어린이들을 위해 영상편지를 촬영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에게 내 편지와 기도가 희망이 된다고 생각하자 ‘내가 여기 그들과 함께 살아있다’는 생각에 행복감이 차올랐다. 작은 일에 더더욱 감사하기 시작했다. ‘돈 쓰지 말라’면서 가방에 간식을 잔뜩 넣어주는 동기의 모습, 졸음이 쏟아지는 오후에 달달한 커피를 사준 선배에게서 사랑을 느꼈다.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이 가슴에 팍팍 와 닿았다.
풍요로웠을 때는 끊임없이 나만 생각했다. 돈이 많으면 이 세상이 내 것처럼 느껴져 이웃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진다. 복음에서 부자가 문 앞에 온 라자로를 모른 척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 자신이 가난해져야 했다. 그래야 멀지 않은 이웃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순히 돈을 적게 쓴다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학창시절, 어머니로부터 “오늘은 집에 바로 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번 사순 시기에는 하느님께서 이렇게 불러주시는 것 같다. 하느님 자녀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주님 저 도전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