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중국 가톨릭 박해사] (3) 제2차 교난 - 역옥 (상)

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입력일 2011-04-12 13:36:06 수정일 2011-04-12 13:36:06 발행일 1997-01-26 제 2037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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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샬 신부 등 8명 능지처사형 받아 
「부득이」저술 천주교 논박…성당 파괴
제2차 교난은 1659년에서 1665년까지 양광선이 일으킨 역옥이다. 제1차 남경교난이 발생한지 약 50여 년 만에 2차 교난이 발생하였으며 교난 원인의 일부분은 1차 교난과 비슷하다.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의 고유한 역법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며 심최가 일으킨 교난에도 이러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순치제가 서거하고 강희제가 7세에 즉위하였다. 강희제는 나이가 어리므로 4명의 보정대신들이 정치를 하였다. 청나라 때 선교사들은 만주식으로 머리를 하나로 땋아 늘어뜨리고 만주식 옷을 입었다. 아담 샬 신부는 1645년 역서를 완성하였다. 샬 신부는 정확한 계산으로 수력을 하였으며 일식, 월식 시간도 정확하게 맞추어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중국 천문학에는 중국학파와 회회학파 두 개의 학파가 있었는데 둘 다 일식 월식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지 못했으며 역서를 만드는 데 있어서도 계산을 잘못하여 틀리는 게 누적되어 손을 댈 수 없을 정도였다.

1644년 순치제는 샬 신부를 흠천감 감정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중국인의 수학 지식은 상식적이었으며 천문학은 점성학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샬 신부는 순치제의 고문과 사부 역할을 하였다. 샬 신부는 1658년 2월 1일 1급 정품에 속하는 광록대부 봉호를 받았다. 관모에는 홍색 보석을 달고 두 날개를 펴고 있는 선학 수를 놓은 조복을 입었다. 그리고 샬 신부의 3대를 1급 정품으로 승봉하였다. 중국에서는 국가의 큰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황제가 성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그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샬 신부의 증조모에게는 조씨 성을 조모에게는 낭씨 성을 모에게는 사씨 성을 하사하였다. 샬 신부가 순치제에게 청을 하여 1660년 페르비스트 신부가 섬서성에서 흠천감으로 왔다. 이때 그는 중국에 온지 불과 4년 밖에 안 되었다.

중국의 천문학자인 양광선은 샬 신부를 질시해 오다가 순치제가 서거하자 보정대신들 중에 천주교와 서양 선교사들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기회로 삼아 박해를 일으켰다. 순치제가 워낙 샬 신부에 대한 신임이 두터우므로 관리들 중에는 샬 신부를 질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또 샬 신부는 흠천감에서 일할 때 중국학파와 회회학파 천문학자들로부터 질시를 받았다.

양광선은 안휘성 흡현 사람이다. 이 교난은 단지 예수회 회원을 겨냥한 교난이었으며 특별히 샬 신부를 겨냥한 것이었다. 고발 내용은 천주교 선교사들이 하고 있는 역법은 중국의 전통적인 역법이 아니라고 하였다.

양광선은 천주교를 논박하기 위하여「부득이(不得已)」를 저술하였다. 1664년 천주교를 모략하는 내용을 적은 전단 5천 부를 인쇄하여 각지에 산포하였다. 순치제가 서거 후 강희제는 아직 어리고 선교사들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 전국에 성당과 교회 건물은 봉쇄 아니면 파괴되었다.

북경에서 샬 신부와 페르비스트 신부, 부글리오 신부, 마갈하에스 신부, 교우 관원 이조백 허지점 반진효 등 모두 8명이 구속되었다. 당시 샬 신부는 73세의 고령으로 중풍이 되어 몸은 마비가 되고 언어 장애가 왔다. 샬 신부는 노인이므로 9개의 쇠사슬 형구를 풀어주고 우리나라의 칼과 비슷한 형구를 씌웠다. 샬 신부는 감옥에서 호흡 곤란을 일으켰으며 페르비스트 신부는 샬 신부가 언어 장애였으므로 심문할 때 샬 신부를 대변하였다. 1665년 1월 1일 신부는 불괴를 도모한 주범이라 하여 교수형이 과해졌으며 페르비스트 신부와 부글리오 신부 마갈하에스 신부는 각장 1백 대를 결장하여 추방시키기로 되어 있었다. 상황이 바뀌어 모반 대역죄를 적용하여 북경에서 체포된 8명에게 모두 참수형이 과해졌다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8명에게 모두 능지처사형이 과해졌다.

각 성의 총독과 순무들은 서양 선교사들을 체포하여 북경으로 압송하였다. 관리들이 일으킨 박해이므로 어떤 지방관은 선교사들을 동정하여 강소, 복건, 호광 등지에서는 선교사들을 우대하였다. 어떤 지방관은 병사들을 시켜 선교사들을 호송까지 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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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자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