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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천주실의] (2) 천주(天主), 만물의 주재자

박종구 신부(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
입력일 2010-05-26 01:21:00 수정일 2010-05-26 01:21:00 발행일 2010-05-30 제 2699호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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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적 의미 ‘천’ 개념
인격적 개념으로 승화
첫 장에 창조주 제시해
부족한 천주 의미 보완
「천주실의(天主實義)」는 한자(漢字)의 뜻만 새긴다면 ‘천주의 참된 의미’ 정도로 옮길 수 있을 듯하다. 리치가 이 책을 저술할 때 하느님 존재의 의미를 소개하는 것이 그만큼 일차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리치는 어떤 의미로 이 표현을 사용했을까? 라틴어를 신학언어로 사용했던 세계에서, 전혀 다른 표의문자를 지닌 사유세계로 들어왔을 때 용어의 사용법은 그렇게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리치가 데우스(Deus)를 지칭하기 위해 선택한 ‘천주(天主)’는 과연 의심 없이 받아들일만한 표현이었을까?

공자(孔子)시대만 하더라도 인본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유가의 전통은 귀신이나 천(天)을 해설하기보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중요시했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성인군자(聖人君子)의 도(道)를 잇는 전통이 생겼고, 이 전통은 도통사상으로 불렸다.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는 하늘-천(天) 사상은 원시유가에 나타나는 일종의 방외적 주제였다. 그래도 인격적인 의미나 형이상학적 의미를 나타내는 천(天) 혹은 천명(天命)사상이 고대세계에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공자는 자신의 자전적 고백문에서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다(五十有五而志于學… 五十而知天命)(爲政)’고 했다. 또 중용(中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늘이 명한 바를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부른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천(天)을 주제로 하는 표현들은 헤아릴 수 없지만, 현대의 종교인들처럼 천(天)을 기도의 대상으로 명확하게 지시하는 차원은 아니다.

공자 이전의 고대세계에서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천(天)은 인격적 의미보다는 실체적 의미가 강하게 암시된다. 이 전통은 공자 이후 진한시대를 거쳐 송명유학에 와서는 더욱 강화되어 나타난다.

리치가 도착했던 시대가 16세기말이니 천(天)의 관념은 종교에서 의미하는 인격(人格) 개념과는 멀다고 하겠다. 따라서 리치의 천주(天主)는 자연스럽게 천(天)의 실체적 개념 위에, 주(主)를 덧붙임으로써 천(天)의 주재자(主宰者)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천(天)은 형이상학적이며 동시에 자연천의 개념이며, 천주(天主)는 지상의 존재에 대비되는 천상적 존재로서 인격적 개념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창세기의 하느님은 창조(創造)와 주재(主宰)의 양가적 의미를 전제하는 개념이다. 이런 의미를 염두에 둘 때 천주는 의미상 만물의 주재자라는 성격은 드러내지만, 창조의 존재라는 관념은 희박함을 알 수 있다.

일반 교리서가 처음부터 창조주 하느님을 천명하면서 시작하는 것처럼 「천주실의(天主實義)」 상권의 첫 장에서 하느님을 창조주로 제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성서의 하느님을 천주(天主)로 부르지만, 천주는 창조주이며 만물을 주재하는 존재인 것이다.

박종구 신부(예수회·서강대 종교학과 학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