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는 부득이 초청을 받아들였으나 여러분 앞에서 무슨 말씀을 드리면 좋을지 모르는 심정으로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무엇을 여러분보다 더 많이 아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으로부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특히 우리사회의 요즘의 사정에 대해서는 많이 듣고 배워야 할 처지입니다. 그럼에도 초대에 응했으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어서 우리나라가 현재 하고 있는 개혁에 대해서 제가 느끼고 있는 것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개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제가 아는 것은 신문은 통해서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신한국 건설을 위해서는 반드시 한국병을 치유해야 하고 그 중에서도 이른바 총체적 부정부패를 척결해야 한다는 강한 소신과 사명의식으로 시작한 개혁은 불과 반년 남짓한 세월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엄청난 충격과 함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무엇보다도 성역 없이 진행되고 있는 사정은 역대 어느 정권도-절대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군사정권도-감히 할 수 없었던 공직사회의 물갈이를 하였고 또 아직 하고 있습니다. 입법과 행정, 사법 그리고 군 그 어느 곳의 그 누구이든 이제는 사정의 엄정한 조사를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최소한 누구도 이제는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을 수는 없다는 인식이 공직자는 물론이오 일반 국민에게 깊이 새겨졌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개혁은 분명히 큰 성과를 이미 거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은 참으로 잘 되어 가느냐? 개혁은 성공할 것이냐? 이렇게 묻는다면 지금 아마 많은 분이 선뜻 그렇다고 답을 하시기 어려워 할 것입니다. 뿐더러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정치는 시작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80%가 넘는 가히 거국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여론조사 발표가 없어서 알 수는 없으나 그만큼 열광적인 지지를 여전히 받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언론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개혁은 좋은데 너무나 일방적이고 독단적이다’라는 비판도 일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층의 변화가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첫째 그분을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들의 상당수는 가진자들이었고, 그리고 특히 기득권층이었습니다. 이분들은 대선 때 김영삼 후보가 개혁속의 안정이라고 했는지 안정속의 개혁이라고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쪽이든 안정을 주리라 믿고 그에게 투표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당선된 후 김영삼 대통령은 개혁을 통한 안정을 말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아주 강한 신념을 가지고 그를 지지한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분명하게 개혁을 택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를 믿고 밀어준 이른바 기득권층은 상당수 개혁의 대상이 되고 피해자가 되어 그로부터 심리적으로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김영삼 대통령에게 아직 기대를 걸고 지지하는 이들은 대선 때 다른 후보에게 개혁하여 주기를 믿고 표를 던진 이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정치를 적극 지지한 사람입니다. 지지발언을 몇 차례 공개적으로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참으로 이제 더 이상 부조리 속에 후진국으로 떨어지지 말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필코 발전과 도약을 기해야 하며 이를 위해 개혁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개혁은 실명제를 포함하여 절대로 성공해야 합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고 지혜를 모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합니다. 이 성공을 위해서 외람됩니다만 몇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첫째 대통령을 비롯하여 개혁을 선도하시는 분들은 지금 실명제나 개혁에 대하여 사람들이 왜 걱정을 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그 이유를 깊이 헤아려 보고 그것에 참으로 현명하게 또한 신속하게 대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지만 지금은 결코 국민의 절대 다수가 지지하는 것으로 너무 과신해서 모든 것이 잘 되어가는 줄 알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뜻이 있는 국민들은 개혁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이들이 개혁을 지지하면서 동시에 염려합니다. 제가 보기에 염려하는 큰 이유는 대통령이나 그 측근이 자신만만하고 중대한 결정을 너무 독단적으로 내리고 그 결과 오늘날 많은 이들이 불안해하고 그것이 경제를 위축시키고 있다고 보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김영삼 대통령은 과거의 분들과는 전혀 다르게 들을 줄 알고 의논할 줄 아는 분으로 오늘까지 믿고 있습니다. 대통령 앞에서는 장관도 ‘노’를 못한다든지 또는 대통령 자신이 ‘노’라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염려 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개혁을 자칫 실패로 몰아갈 아주 큰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국가 운명이 좌우되기 때문에 대통령은 모든 의견에 열려 있어야 하고 모든 의견을, 반대의 소리까지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2. 다음으로는 우리 국민 모두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개혁에 적극 동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보다 나라와 겨레를 먼저 사랑하는 애국심입니다. 누구보다도 정치인, 경제인들이 자신의 영달이나 이해관계를 넘어 진정으로 나라를 위한 정치인과 나라를 위한 경제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 개혁이 성공하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망하는 것 입니다. 정치인과 경제인이 살아남을 수는 물론 없습니다. 가령 실명제 실시로 타격을 입은 이들이 마음이 너무 상한 나머지 대통령과 힘겨루기라도 하듯 누가 이기나 보자하고 있다면 그래서 엄청난 액수의 돈이 돌지 않고 있다면 그 결과 실명제가 실패하고 이어서 개혁이 실패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대통령이 실패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나라가 실패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때문에 개혁의 대상이 된 분들도 피해의식에만 젖지 말고 심기일변하여 개혁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정부와 사회도 이분들을 전과자 취급하지 말고 함께 사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3. 우리의 총체적 부정부패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물질주의, 황금만능주의입니다. 돈은 수단인데 그것이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반대로 목적이 되어야 할 민간은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총체적 부패를 가져 왔습니다. 동시에 이와 함께 돈 때문에 수단으로 밀려난 인간은 경시되고 유린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사회에 만연된 인간경시, 인명경시 풍조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극단으로 말하면 돈을 벌기 위하여는 그로 말미암아 노동자 몇 사람이 죽고 팔다리가 부러져 병신이 된들 할 수 없다는 의식이 상당히 잠재적으로 널리 퍼져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실 인간을 희생하여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두드러진 것으로는 인구조절이 경제발전의 필요불가결의 조건처럼 인식 되어서 정부의 묵인 또는 방조 아래 연간 1백50만명이 넘는 태아의 생명이 살해되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좀 잘 살아보겠다고 스스로 자식들의 어린생명을 잘라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잔인하리만큼 자행된 낙태가 경제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로 말미암아 어머니의 마음에서부터 우리 모두의 마음에 이르기까지 인명을 경시하는 윤리 부재와 가치관 부재의 상황을 가져 온 것은 사실입니다.
4. 이와 아울러 우리는, 특히 사회지도층은 특권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제 자신, 저의 신분과 지위 때문에 어디가든지 대접을 받는 편입니다. 그래서 늘 그것을 기대합니다. 저는 스스로 이것을 반성하면서 이런 기대를 버리도록 노력해 봅니다만 저의 잠재의식 속에는 항상 대접 받기를 바라는 불순한 심리가 있습니다. 이처럼 나는 장관이다, 나는 국회의원이다, 그러므로 나의 신분, 지위, 위신을 생각해서 나는 이러이러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이런 우월감, 일종의 콤플렉스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사회에 인간의 존엄과 평등의 사상이 뿌리내리기는 힘듭니다.
노동자들이 흔히 하는 말로써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임금인상이 아니다. 사람대우이다. 사주나 관리직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에 대한 말씨나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를 보면 노사문제는 단지 임금문제와 같은 이해관계 문제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보다 깊이 인간관계의 문제입니다. 때문에 기업을 하는 분들은 나름대로 애로가 크겠으나 이런 근본적인 문제점에 있어 인식이 달라져서 노동자를 진심으로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알고 존중한다면 노사분규도 훨씬 적어질 것이고 노사 간 협조가 잘 이루어져 사회안정과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같은 이치에서 우리는 우리나라에 와있는 모든 외국인 특히 불법체류 노동자들에게 착취가 아닌 인간적인 대우가 절실히 요망됩니다. 이렇게 인간존중의 정신이 정치, 경제를 비롯하여 우리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우리 자신의 가치관 정립의 기틀이 될 때에 우리는 참된 의미의 국민화합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국민은 자발적으로 힘을 내어 일하고 나라발전에 헌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합쳐진 힘은 우리나라를 선진국 대열에 올릴 것이고 마침내 민족통일을 이룩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