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태어나도사제의길을(종료)

[다시 태어나도 사제의 길을 - 오기선 신부 사제생활 50년의 회고] 22. 「따벨라」의 부록「숩뿔레멘뜸」

입력일 2011-05-17 16:15:38 수정일 2011-05-17 16:15:38 발행일 1983-05-15 제 1355호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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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월의 국내소식ㆍ외국정보 실어
신학생들 눈물 자아냈던 그 인쇄기는 지금 어디에…
그 당시 잡지가 오늘날은 큰 사료로
용산신학교 순 라틴어 교지「따벨라」가 1924년부터 홍콩 나자렛 인쇄소에서 인쇄하게 되자 서울 용산대신학교 학생들은 이제 살았다 하고 기지개를 켰다. 그러나 이게 웬걸, 갈수록 첩첩 태산이었다.

교장신부님은 인쇄기를 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시고는 잡지를 하나 새로 찍어내기로 하셨다.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격이었다. 그 당시 나는 부속중학교 5년을 마친 뒤 1년 동안 라틴어만 전공하고 1926년 9월 개학부터 대신학교 철학과로 올라간 직후였다. 순 라틴어 월간지를 낸다고 우리 윗반들이 곤경을 치르더니 이제는 우리 철학반에도 떨어졌다. 문선에서부터 해관(조관해체)까지 인쇄소에서 하는 일을 일체 순서대로 다하게 됐다.

우리가 인쇄한 것은 말하자면 부록이어서 홍콩에서 인쇄된「따벨라」지가 도착하면 그사이에 우리가 인쇄한「숩뿔레멘뚬」을 끼워 발송하고 나면 다음 달 원고 뭉치가 교장 신부님 손에서 교부됐다. 철학과 2년 신학과 4년 해서 6년을 그 곤경을 치뤄야했다. 이 난리는 우리가 1932년 12월 17일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다음에야 끝이 났다.

「숩뿔레멘뚬」의 내용은 한 달 동안의 국내 소식과 외국의 정보를 수집한 것이었다.

1926년 늦은 가을부터는 교장 신부님이 인쇄용으로 카메라 한대를 구입해 교실 한 귀퉁이에 암실을 꾸몄고, 김피득(彼得) 베드로 신학생에게 책자를 주셔서 사진을 찍게 했다. 한 장 두 장 찍은 것이 소경 문고리 잡듯 곧잘 찍었다. 그 사진들을 시사용으로 부록에 실었다.

1926년부터 32년 말까지 우리 손으로 인쇄해내 부록은 지금 회고해 보면 아름다운 추억 거리의 하나이다.

내가 졸업한 4년 후인 1936년 윤을수 신부가 대신학교 교장에 취임하자 보기만 해도 골치아픈 인쇄기ㆍ문선관ㆍ국한문과 영어 활자 전부를 혜화동 대신학교로 옮겨갔다. 부록을 계속 인쇄한다고 해서 옮겨갔는데 지지부진하게 인쇄해내고 그 뒤는 기억에 없다.

그러나 윤 신부님은 그 인쇄기로 커다란 역사적 사업을 해내셨다.

1926년부터 우리에게「한국 천주교회사」를 강의해 주신 삐숑 송세흥 신부님은 37년에 악성 안질에 걸려「빠리」본부로 치료차 떠나셨다. 가셔서 하라는 눈 치료는 아니하고 우리 복자 김 안드레아 신부님의 편지 26통 철야 필사본을 해 가지고 돌아오셨다.

이것을 윤 신부님이 옮겨가신 그 인쇄 기계로「프로 코리아」AㆍB 두 권에 전문 인쇄 게재하여 모든 신부ㆍ주교님께 무료로 배부했다. 오늘도 내 손에 남아 있다.

그 후 그것을 불어판으로 찍어 우리 교회사에 남는 역사적인 출판 사업을 한 셈이다. 나는 그때부터 원수 같았던 그 인쇄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

송 신부님이 철야로 필사본 해 오시기 전에는 단편적으로만 김 신부님 편지를 엿볼 수 있었지만, 송 신부님과 윤 신부님 덕으로 그 모든 선한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그것도 정신 인쇄로 어디에도 손색이 없이 펴냈으니 말이다.

지난 72년 7월 27ㆍ28일 이틀 동안「빠리」외방전교회 부총장을 지낸 권충신 미카엘뀌니 신부님과 그 1백54면이나 되는 편지를 전부 사진 복사하는데도 이 두 권의 책이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 인쇄기로 대신학교와 소신학교의 라틴어 교본들도 찍어냈는데 1939년 윤 신부가 문학적공차「빠리」로 떠나기 전에 인쇄기를 처분하고 떠났다.

만고에 숱한 신학생들의 눈물을 자아냈던 인쇄기는 지금은 어디에서 우리의 눈물바다를 두둥실 떠다니는지…

1945년 여름 윤 신부가 미국을 거쳐 오랜만에 귀국해 주교댁에 머물게 됏다. 그때 좌중에서 자연히 옛날 얘기가 나왔고 그 지겨웠던 인쇄기 얘기도 나왔다.

그 인쇄기로 찍어낸 부록 잡지를 모아 둔 것이 내게는 큰 사료가 됐다. 그 부록에는 국내에서 작고하신 전교 신부님들과 한국 신부님들의 약력과 추도사가 거의 다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그때 시사 사진들이 옛날을 회고시켜 주기 때문이다.

인쇄기를 다루면서 나는「따벨라」지를 만들 때처럼 매스콤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배운 셈이 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