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눈으로 본 신앙

[과학의 눈으로 본 신앙] 25(끝). 하느님 나라의 실현

불변의 하느님 앞에 회개하라 많은 현대 과학자들은 우주 팽창과 빅뱅을 믿는다. 스티븐 호킹은 지구가 둥글고 경계가 없듯이 우주와 시공간은 경계가 있을 수 없다고 제안하였다. 더구나 현대과학은 과학법칙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현실에서 두 개의 물리적 현상이 충돌해 기상천외한 일이 생긴 일은 한 번도 없다. 인류가 지금까지 관찰과 측정을 통해 알아낸 과학지식은 그야말로 ‘우물 안의 개구리’이고 진리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끝없이 많은 진리와 진실이 인간의 관찰과 측정 저 너머에 남아있다. 그러나 일반 현대인들은 상식 수준의 지식을 갖고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보이지 않는 우주를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과학으로 덧칠하여 서술한 것은 엄청난 오류였다. 주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과학적 또는 논리적으로 표현하려고 편법을 사용하였을 뿐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를 볼 때가 되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를 먹는 자는 죽지 않고 살아…”(요한 6, 10~51). 예수님은 모든 이에게 자신의 살을 먹고 다시 살기를 권하셨다. 지고지순한 사랑.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아 모든 이에게 나누어 주신 사랑이다. 계곡에서 보면 산 전체를 볼 수 없지만, 산 위에 올라가 보면 산 전체가 보인다.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을 만나듯이 우주 만물 전체를 보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우주, 별, 태양, 탄소-질소-산소 주기, 빛과 에너지, 지구와 지각 위의 환경, 생명과 생태계, 세포와 기관, 먹이사슬과 광합성, 탄소-질소-산소-수소의 고분자, 원자와 핵, 미립자와 쿼크, 존재와 우리. 이 모든 개체의 역할과 전체의 조화를 보면 비로소 우리가 산 위에서 보듯이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진리와 조화, 시공간, 질서와 체계, 자연스럽고 당연함. 이 모든 것은 지고(至高)의 사랑, 즉, 하느님이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십시오. …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 21~23).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 예수님의 몸을 나누어 먹어 하느님과 한 몸이 되는 것. 이것이 살면서 우리가 되어야 하는 모습이고, 죽은 후 다시 살아서 되어야 하는 모습이다. 예수님은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신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하셨다. 하느님과 같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세상 이익에 앞서 하느님 뜻에 따라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라는 말씀이다. 예수가 죽은 후 제자들은 믿음이 사라졌고 추종 세력으로 몰려 죽을 것이 두려워 모두 달아났다. 사흗날에 예언하신 대로 부활하신 예수를 보고 제자들은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목숨을 버리며 이웃을 사랑하는 길을 실천한 것이다. 인간은 나약한 제자들의 모습과 같이 세상사에 두려워 일시적으로 하느님을 배반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진 다음에는 하느님을 닮아 완전한 진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고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5). 예수님은 나자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행하시고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죽은 사람이 썩어 탄소, 질소, 산소, 물 그리고 다른 물질로 분해되는 것만 믿는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다.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살아서 육체를 지배하던 에너지는 어디로 갔는지 허무한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갑자기 사라진 이온화 에너지와 정신 지배 에너지는 분명히 불변인데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보이지 않는 세상.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 나라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라는 가르침은 불변이다. 이제 나도 우물 밖으로 나와 회개할 때가 됐다. 내 이익을 위해 하느님을 무시하고 교만하게 산 삶을 되돌아봐야 하겠다. 국일현 (그레고리오·대전 공주 중동본당·원자력연구원 연구위원·한국방사선산업학회장) 그동안 집필해 주신 국일현 박사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입력일 2008-01-01

[과학의 눈으로 본 신앙] 24.구원돼야 하는 소중한 생명

주님은 인간의 양식이며 에너지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요한 1, 4) 물질의 근본 작은 소립자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E=mc²이 표현하듯이 빛의 속도에 제곱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 세상 모든 물질은 이렇게 엄청난 에너지를 안고 태어났고 오늘도 별과 태양에서는 이런 탄생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지구 위의 모든 생물의 생은 태양에너지를 근본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지구 위에 사는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쉽게 느낀다. 지난여름 그렇게 무더워 에어컨을 끼고 살더니 이제 온몸을 움츠리고 난방시설을 찾는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울면 두려워 떤다. 조금만 비가 많이 와도 농사가 그르치고 가물면 하늘을 원망한다. 그런데 겨우 세포 하나로 시작한 주제에 불과한 인간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다른 사람 것을 빼앗고 짓누른다. 죽으면 모두 분해되어 탄소, 질소, 산소, 수소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하는 인간은 부모형제를 외면하고 이웃을 미워한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의 에너지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진리를 외면하는 곳에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기를 바라고 주셨고 그래야만 자연 질서가 유지되듯이 하느님 나라의 질서도 유지된다. 수력발전소는 위치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것이다. 화력발전소는 보일러로 열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꾼다. 다리미는 전기에너지를 열에너지로 바꾼다. 전철은 전기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꾼다. 선박은 열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면서 움직인다. 사람 몸속에서는 ATP로 영양소가 타면서 우리가 활동하는 운동에너지로 나타난다. 사람이 오관을 통하여 감각이 뇌로 전달되는 과정은 신경세포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인 변화와 전달로 이루어진다. 대개 각 뉴런의 휴지막전위는 -70mV이고 탈분극이 일어나면 35mV까지 오른다. 체성신경계는 뇌신경과 31개 척수신경으로 구성되어 말초신경계로 연결되어 감각은 이온 채널을 형성하면서 빠르면 1/1000초 내에 뇌에 전달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삶도 전기화학적인 에너지의 변화로 다스려지고 있다. 우주 삼라만상이 에너지의 변화로 탄생하고 지구 위의 생명체와 인간의 삶도 에너지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에너지!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석유와 전기를 뜻하고, 인간은 식량을 통해서 얻고, 다른 생물은 먹이를 통해서 얻는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 53)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 55~59)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양식이고 살아있는 에너지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에너지가 존재하는지?’ ‘물질의 근본인 광자(빛)와 입자들이 왜 서로 확률진폭을 따르면 작용하는지?’ 현대과학도 알지 못한다. 보이는 것만 믿고 일반상식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보이는 것이 현실인 것으로 착각하고 산다. 그러면서 하느님을 외면하고 욕심에 매달리고 눈앞 이익에만 집착한다. 오늘도 과학자인양 말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비현실이라고 말하며, 예수님에게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그 살은 태고에서부터 있었던 에너지이고 그 빵은 영원히 존재할 생명의 의지임을 모르고 있다. 주님은 오늘도 의심하는 당신에게 보고 만져서라도 믿기를 권유하신다. 그리고 그 분은 피와 땀을 흘리시면서 당신이 오늘 미사에 참여하여 그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셔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기도하신다. 주님은 우주 만물에게 ‘에너지의 보존’이라는 보물을 주셨고 우리에게는 미사를 통해 ‘생명의 보존’이라는 보물을 주신다. 에너지와 생명 보존법칙!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5~26) 이것이 당신이 주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이다. 국일현(그레고리오, 대전 공주 중동본당, 원자력연구원 연구위원, 한국방사선산업학회장)

입력일 2007-12-23

[과학의 눈으로 본 신앙] 23.만물의 근원, 빛과 생명이신 주님

보이지 않는 세계 요한복음 1장에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 모든 것이 그 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 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 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 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한 처음’이란 시작을 말하는 것이요, ‘말씀’이란 하느님의 창조의지이자 의사표현이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표현한 구절이며 예수님이 생명이요 빛의 원천이심을 밝힌 것이다. 실제로 과학적으로 봐도 ‘빛과 생명’은 이 세상 모든 것의 원천이다. 따라서 인간이 신앙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신앙은 ‘이것 혹은 저것’을 고르다가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세상 모든 것의 원천인 주님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든 물질이 원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안다. ‘우물 안 개구리’인 인간은 아무리 정교한 전자현미경을 사용한다고 해도, 원자보다 작은 소립자 세계는 볼 수 없다. 소립자는 입자 가속기로 궤적을 추적하고 계산해낸, 상상하고 추론할 수 있는 존재일 뿐이다. 오늘은 이 작은 미시세계로의 여행을 떠나보자. 원자핵이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졌고 양성자와 중성자는 쿼크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 20세기 후반이다. 중성자는 전기적으로 +⅔인 위 쿼크 한 개와 -⅓인 아래 쿼크 두 개가 합하여 생겨났고 전기적으로 0이다. 양성자는 +⅔인 위 쿼크 두 개와 -⅓인 아래 쿼크 한 개가 합하여 만들어졌고 전기적으로 +1이다. 또 이들은 빨강, 초록, 파랑이라는 양자색역학 방법을 거쳐 글루온과 상호작용을 하며 결합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우주만물은 모두 이렇게 위, 아래에 걸쳐 이상한 쿼크로 이루어져 있다. 쿼크는 많은 소립자들과 서로 작용하고 배합하여 원자를 이루고 물질의 근본이 되고 있다. 이 세상 물질의 근본인 소립자는 질량을 에너지의 단위로 환산하여 표기한다. m=E/C²로 표현하면 너무 작아서 E=mC²(에너지는 빛의 속도에 제곱한 값에 질량을 곱한 값)라는 거대한 에너지로 환산하여 사용한다. 다시 말해서 우주 근본 물질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데는 ‘빛의 속도’(빛은 1초에 약 30만km를 간다)에 제곱을 곱한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하면서 별과 태양에서는 원소들이 탄생한다. 이러한 창조 에너지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밤에는 별빛으로 전해오고, 낮에는 햇빛으로 전해오고 있다. 미국의 물리학자 파인만은 빛의 움직임, 간섭, 회절, 굴절 등 거시현상을 양자역학적으로 표현하였고, 거시적 확률이 고전적 파동역학과 훌륭하게 일치함을 보여주었다. 미세한 광자가 전자에 흡수되고 방출되는 확률 진폭의 합과 곱으로 표현하면서 소립자의 세계와 거시세계를 연계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 눈으로 보는 현상은 미시 광자와 소립자의 상태 확률 진폭의 종합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미시세계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일어나고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파인만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실재라면 세상은 당장 와해될 것이다”고 말하면서 “확률 진폭이 왜 이렇게 표현되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는 알면 알수록 간단한 사실조차 설명이 불가능해지며, 우주는 신비로워진다”고 하였다. 파인만이 그랬던 것처럼 물리학자는 사실 이 세상의 물리적 작용에 대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할 뿐, 그렇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과학자들은 빛이 광자라는 극히 작은 입자로 이루어졌고 전자에 흡수되기도 하고 방출되면서 적외선, 빨강, 노랑, 파랑, 보라, 자외선 등 각종 주파수를 갖는 파동의 성질을 나타내며 만물의 특성을 변화시키는 것도 밝혀냈다. 오늘도 빛이 산란하여 수없는 광자가 튀어나오며, 비가 오고 갠 하늘 건너편에 무지개가 하늘을 가르고 있다. 하느님은 태초부터 보이는 물질 세계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를 채색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 12)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다. 그 분은 창조이시고, 인간이 따라 살아야하는 정의의 길이다. 국일현(그레고리오, 대전 공주 중동본당, 원자력연구원 연구위원, 한국방사선산업학회장)

입력일 2007-12-09

[과학의 눈으로 본 신앙] 22.하느님의 뜻

사랑, 그리고 진리와 질서 자연세계는 진리와 질서가 뚜렷하다. 태양계가 속해있는 은하가 회전하고 태양은 초속 200km 이상으로 은하 주변을 돌고, 지구는 이 태양의 주변을 돌고 있다. 온 우주의 별과 행성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폭발하여 사라지며 질서와 조화 속에 운항하고 있다. 지구는 태양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생물이 살 수 있는 온도를 유지하고 중력이 작용하여 만물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물은 온도가 오르면 끓고 수증기가 되고, 온도가 다시 내려가면 얼음이 되기 때문에 비가 오고 눈이 온다. 지구가 약간 기울어져 태양 주변을 돌기 때문에 북반부가 여름이면 남반부는 겨울이 된다. 봄이 되면 산천초목과 모든 생물이 소생하고 가을이 되면 추위에 대비하여 생물은 영양을 축적하고 스스로를 보호한다. 단세포로 태어난 모든 생물은 성장하여 왕성하다가 때가 되면 산화하고 퇴적하여 죽고 소멸한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고 나도 예외가 아니다. 진리와 질서는 하느님의 뜻이다. 막 새끼를 낳은 고라니는 제 새끼가 죽을까봐 쉴 새 없이 온 몸을 혀로 핥아준다. 동물이 배설한 배설물은 식물의 먹이가 되고 비가 내려 식물이 자란다. 식물이 내어뱉은 산소는 동물이 호흡하며 사는 원천이 되고 동물이 내어뱉은 탄산가스는 식물이 자라는 원동력이 된다. 이 모든 것이 조화이고 사랑이며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자연에 질서가 있고 법칙이 있듯이 사람의 삶에도 질서가 있고 법칙이 있다. 먼 옛날에는 힘이 센 자가 자신의 부족을 지켰고 나이 들고 지혜 있는 족장이 사람 사이의 일을 판단하고 사리를 다스렸다.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드리고 농사철이 되면 서로 돕고 추수를 하면 나누어 가졌으며 약한 자를 돌보고 서로 사랑하며 살았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은 돕고 서로 나누며 약한 사람을 보호하며 산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그런데 인간은 ‘소유’를 시작하면서 내 것을 찾기 시작했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가지고 싶고 둘을 가지면 셋을 가지고 싶어했다. 내가 필요 없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은 더 갖고 싶어 한다. 쌀 99가마를 가진 사람이 가마를 가진 사람의 것을 뺏어 100가마를 채우고 싶어한다. 모든 사람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싶고, 다른 사람을 굴종시키면서 내 뜻대로 하고 싶어 한다. 힘이 센 자는 약자를 억누르고 죽이며 빼앗고 핍박한다. 단지 하나의 세포로 태어나 성장한 사람이 돈도 갖고 명예도 갖는다. 과거 한 나라의 왕은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세력을 굳히고 더욱 확장하며 위협요소를 제거하였다. 권력을 잡은 자들은 세력을 규합하고 백성을 억누르며 착취하였다. 불쌍한 사람들은 하늘의 뜻이려니 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해갔다. 그런데 이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다. “나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마라. 폐지하러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 5, 17) 예수님은 사람이 살아가야할 법과 질서를 바로잡아 완성하셨다. 십계명과 모세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화해하여라.”(마태 5, 21~25), “극기하여라.”(마태 5, 27~28), “정직하여라.”(마태 5, 37), “폭력을 포기하여라.”(마태 5, 39),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44),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 48)라고 하셨다.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 예수님은 사랑을 새로운 계명으로 주셨다. 그리고 당신 스스로 사랑을 몸으로 실천하여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여야 하는 이유도 가르쳐주셨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아버지의 뜻’, 자연세계는 진리와 질서가 뚜렷하다. 국일현(그레고리오, 대전 공주 중동본당, 원자력연구원 연구위원, 한국방사선산업학회장)

입력일 2007-12-02

[과학의 눈으로 본 신앙] 21.하느님의 기적

기적은 삶 속에 있다 기적. 이 단어는 인간의 상식이나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일어나는 일을 일컫는다. 비행기 사고가 나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어느 한 사람이 상처하나 없이 살아났다면 이를 기적이라고 말한다. 사람 사이에서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 자연 질서를 거슬러서 일어나면 이것을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기적이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제외하고도 구약이나 신약에는 무수한 기적 사례가 나온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이 기적을 상식에 위배되고 과학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믿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닥치면 하느님에게 의존하거나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로또 복권을 산 사람은 혹시 당첨될까 기대하면서 기적을 바란다. 대학 시험을 치를 자녀를 둔 학부모는 지극 정성으로 하느님께 기도한다. TV나 신문에 대형사고가 발표되고 그 가운데 내 가족이 포함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자기 가족만이라도 기적적으로 무사하기를 기대한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기적이 자신에게 이롭게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눈 앞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기적은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멀리 있는 기적들에 매달리기 보다는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적들에 눈을 돌려 보면 어떨까. 우주 만물과 자연이 내 주위에 있다는 것이 바로 기적이 아닌가. 세상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분명 기적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우주의 별에서 핵융합이 일어나게 하셨다. 또 태양의 핵융합 에너지는 지구에 이르러 만물이 살아가는 에너지를 준다.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이면 곡식이 무르익고 가을이면 잎을 물들인다. 그 에너지로 엽록소는 탄소동화작용을 도와 산소를 배출하여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이 숨 쉬고 살게 하고, 자신은 영양소를 만든다. 이렇게 자연 질서 그 자체가 기적이다. 봄이 되면 얼음을 뚫고 나오는 새싹이 바로 자연 질서이자 기적이다. 그런데 사람은 이 자연 질서를 거슬러 다양한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것을 과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이 알아낸 과학은, 양자역학이 상대성원리와 충돌하고, 세포 분화와 개체 형성의 기작과 이유도 모르는 초보적인 수준일 따름이다. 그나마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런 작은 질서조차 모른다. 반도체의 원리는 몰라도 컴퓨터를 사용하고 인공지능 로봇이 미래에 우리의 손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기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우리들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을 만드신 하느님의 질서와 진리를 알려주시고 그 진리대로 살기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은 사람을 통하여 기적을 행하셨다. 그 기적은 지금도 행하여지고 있고 우리의 삶과 함께 하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르 11, 23~24)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카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요한 2, 1~12), 병자를 고치셨고(마태 14, 34~36; 15, 29~31; 마르 6, 53~56; 루카 4, 40~41), 라자로를 살리셨다(요한 11, 1~44). 이밖에 예수가 기적을 행한 것은 수없이 많다. 예수님은 그렇게 생전에 많은 기적을 행하셨고 돌아가신 후 마지막에는 부활하셨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모두 사람과 관련한 기적이거나 사람 사이의 일이었다. 구약의 하느님의 창조와 섭리의 기적으로 우리에게 보이셨다면 예수는 우리 인간들을 위한 세상살이의 기적을 우리의 눈 앞에서 보여주셨고, 지금도 ‘사랑’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이 사랑의 기적을 두고 어디에 가서 기적을 찾겠는가. 신이 이 땅에 와서 사람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실. 또 그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많은 이들의 사랑 실천보다 더 큰 기적이 있는가. 이렇게 기적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러기에 기적이신 예수님은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마태 12, 8)이라고 말씀하신지도 모른다. 국일현(그레고리오, 대전 공주 중동본당, 원자력연구원 연구위원, 한국방사선산업학회장)

입력일 2007-11-25

[과학의 눈으로 본 신앙] 20.겨우 하나의 세포이었던 인간

낮아지자 인간은 어머니의 난자 즉 작은 수정란인 세포 하나로부터 만들어졌다. 그 세포 하나에는 부모의 유전정보가 들어있다. 모든 생명 세포는 아데닌과 티민, 구아닌과 시토신의 배열인 DNA로 구성되어 있다. 그 배열에 따라서 유전자가 달라진다. 초기 태아는 체세포 분열을 하면서 심장과 손, 발을 만든다. 그리고 열심히 모체로부터 받은 피를 공급받아 각종 장기를 만들어 간다. 후기에는 뇌가 생기고 뼈와 골격도 갖춘다. 태아는 사람의 모양새를 갖추면 자연스럽게 모체로부터 영양공급을 멈추고 몸 밖으로 나온다. 태아가 자기 뜻대로 분화하여 뼈를 만들고 싶으면 뼈를 만들고 피를 만들고 싶으면 피도 만들고 살을 만들고 싶으면 살을 만들면서 부모의 모양을 닮아 성장하는가. 아니면 어머니의 뜻대로 장기도 만들고 뇌도 만들면서 키우는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단 하나의 세포가 모체를 닮아 각가지 장기를 가지고 태어난다. 참으로 오묘한 성장이다. 누구의 뜻으로 만들어졌는가. 처음 나온 아기는 천진난만하고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아기의 모습은 성장하면서 부모를 닮아간다. 막 태어난 아기가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빼앗고 교만하고 거짓을 배우는가. 그 아기가 모체를 배반하고 형제를 괴롭히는가. 이 아기가 성장하여 지식도 갖고 명예도 갖고 권력도 갖고 돈도 갖는다. 고작 염기서열의 배열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포이었고 고분자화합물에 지나지 않았던 생명이었는데 말이다. 처음부터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이 세상 누구를 막론하고 단 하나의 세포에 지나지 않았다. 2000년 전 지구에는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하느님이 마리아를 통해 사람의 모습으로 성장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에게 인간을 복제하여 인간을 만들 것이라고 하면 어김없이 ‘그렇 수도 있다’라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 복제를 시도하는 과학자들 자체도 왜 체세포가 복제 되는지 알지 못한다. 복제기술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기작과 이유 자체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상실기, 포배기, 낭배기를 거쳐 유전정보대로 또 다른 생명체로 성장하는 것을 확인했을 따름이다. 그나마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은 그 기작이나 이유를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는다. 하느님이 동정녀 마리아라는 사람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데 믿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 글 전체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하느님이 온 우주와 지구를 만드셨고 생물을 만드셨으며 염색체와 사람도 만드셨다. 이 우주를 창조한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는데, 동정녀의 몸을 빌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우물 안의 개구리’가 어찌 하느님의 진리를 알겠는가. 모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지 믿는 사람을 바보 취급할 수 있을까. 코끼리 발등에 기어 다니는 개미는 거대한 코끼리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 개미는 코끼리가 잠시 다리를 털면 짓밟혀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다.우주에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작은 한 점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작은 지구 속에서 하찮은 지식을 가진 인간은 오만하여 우주 모든 진리를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하느님을 부정한다. 기껏해야 세포 하나에서 출발한 주제에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려고 요르단으로 요한을 찾아가셨다.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하고 대답하셨다. 그분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어 자신의 모습대로 닮아 살기를 바라며 이 세상에 오셨다. 사람보다 낮은 모습으로 사람에게 세례를 받고 모든 사람을 구하려고 오셨다. 그리고 이 사실을 널리 알려 다른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느님이 낮아져서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듯이 우리도 낮아져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필자도 막 태어난 아기에서 벗어나 또 다시 저지른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용서를 빌고자 한다. 그리고 세상 다른 사람들도 이 진리에 따라 살았으면 한다. 국일현(그레고리오, 대전 공주 중동본당, 원자력연구원 연구위원, 한국방사선산업학회장)

입력일 2007-11-18

[과학의 눈으로 본 신앙] 19.선택의 시각

개미가 바라본 세상 계룡산 밑에는 굿을 하는 장소와 소위 도(道)를 닦는 사람들이 많다. 땅거미가 드리워지고 밤이 되면 산 속에서 굿하고 징치는 소리가 아련히 들린다. 그 소리는 신들린 사람들이 귀신을 부르는 소리라고 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다급해지면 보살과 도사를 찾고, 자녀의 수능 점수를 올려달라고 신령님께 빌고, 점쟁이에게 투자를 묻는다. 이들은 하느님을 서양 귀신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주역, 팔괘, 일월성신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하면서 TV에 나와 세상을 미혹한다. 지금은 번개가 번쩍이고 태풍이 오고 가뭄과 기근이 오는 것이 북태평양 고기압과 국지성 기압골의 이동으로 해석되는 시대다. 인공위성을 통한 관찰과 분석으로 일기예보를 하면서 우리는 자연현상에 대해 좀더 잘 알게 됐다. 인간이 달에 착륙하면서 달에는 계수나무와 토끼가 없다는 것을 믿는 어린이는 없어졌다. 정화수 떠놓고 달에 빌었던 우리 옛 여인네들의 정서도 끝났다. 아직도 원시시대에 사는 사람은 깨어나야 한다. 광대무변한 우주 저편의 은하계나 달에 일월성신이 있는가. 계룡산 속에 산신령이 꼭꼭 숨어사는가. SF영화에 나오듯 땅을 뚫고 들어가면 맨틀이나 지구 핵 위치에 지옥이 있고 지하세계 용암 속에는 귀신들이 득실득실하게 모여 사는가. 우리는 이글거리는 용암 위에 꿈틀거리는 염이 깔리고 얇은 껍질이 덮인 지구라는 동적 안정체 위에 살고 있다. 태양을 중심으로 초당 30km 속도로 공전하고 24시간에 한 번 자전하는 지구는 반지름이 6378km이지만 껍질은 5~50km 밖에 되지 않는다. 그 밑에는 규산염으로 구성된 맨틀 층이 2800km 깊이까지 있고 그 맨틀은 매년 몇 cm 씩 대류하며 열적, 중력 평형을 이루고 꿈틀댄다. 지구의 중심은 철 성분 등 무거운 물질이 고온 용융 상태로 핵을 이루고 있다. 가끔 이웃 일본에서는 지진이 일어나지만, 염을 뚫고 나온 쇳물 재가 하늘을 가리려면 1억년이 더 남았다니 참으로 고맙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이 거대한 존재와 현상이 단 하나의 의지에 의하여 지배되고, 그 지배하는 진리는 하나로 묶여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의 진리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가장 합리적인 상태의 체계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이 동적인 조화에 어떤 변화를 주면 모든 것은 이 변화와 어울러져 또 다른 조화로운 상태로 변한다. 물속의 물체를 잡으려고 손을 넣으면 손이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에서 빛이 굴절하기 때문이다. 이는 돋보기로 빛을 모으는 것과 같은 논리다. 빛은 간섭 현상과 회절 현상을 일으켜 물질의 결정구조를 밝혀내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20세기 초까지 과학자들은 빛은 ‘파동’(연못에 돌을 던졌을 때 생겨나는 물결이 바로 파동이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주 공간에는 그 파동을 매개할 에테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발표된 후, 빛은 입자 특성도 갖고 전자파 특성도 갖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반물질과 광자의 존재도 밝혀졌다. 여기서 상당수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는 더 복잡해 졌다. 양자역학적 해석은 하이젠버그의 불확정성원리라는 벽에 부딪쳤고 이제는 과학도 하나로 묶여지는데 커다란 난관에 봉착했다. 현재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은 실존하는 사실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소립자를 확인하고, 게놈 지도를 그릴 수 있고,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은 관찰했지만 정작 이 모든 것이 왜 그렇게 되는지 모른다. 코끼리의 발톱만 본 개미가 거대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모습을 그릴 수 있겠는가. 문제는 이런 현대과학 지식 조차도 잘 모르는 이들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자만하고 산다는데 있다. 더구나 하느님의 존재마저 자기가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선택을 하는데 아직까지 많은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믿음은 선택이 아니고 믿고 따르는데 주어진 시간은 극히 짧다. 그 짧은 세월을 반성하며 살아도 턱없이 부족한데 주님을 부정하고 핍박하고 살면 어쩌자는 것인가. 국일현(그레고리오, 대전 공주 중동본당, 원자력연구원 연구위원, 한국방사선산업학회장)

입력일 2007-11-11

[과학의 눈으로 본 신앙] 18.사랑의 일치

처지에 맞게 사랑하라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 21~22)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살면서 되어야 하는 모습이고, 죽은 후 다시 살아서 되어야 하는 모습이다. 오늘도 미사에서 예수님을 모신다.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현실로 경험한다. 사랑의 일치! 이 경험은 미사로 끝나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43~44)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셨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그 완전함을 실천하라고 몸으로 명령을 하신 것이다. 하느님을 내 몸에 모시고 아버지가 완전한 것 같이 나도 완전하게 살아야 한다. 온 우주의 진리와 사랑을 느껴 삶에 옮겨야 한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생애와 같이 살고, 삶 전체를 던져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생물은 각기 역할이 있고 처지가 다르다. 그러므로 자신의 역할과 처지에 따라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각자의 역할과 처지가 무엇인지 창조하신 전체와 개체의 모습을 보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 모든 포유동물은 수정란 한 개, 즉, 한 개의 세포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개체로 만들어졌다. 정자가 난자 속으로 들어가 수정란이 되면 이로부터 복잡한 단계를 거쳐 하나의 개체를 이룬다. 단 한 개의 세포가 분화하여 어떤 것은 뼈를 만들고, 어떤 것은 피가 되고, 어떤 것은 뇌가 되고, 어떤 것은 살이 된다. 과학자들은 현미경을 보고 이 분할을 상실기, 포배기, 낭배기 등의 순서로 진행되는 것을 확인하였다. 분화된 세포들은 어느 정도 과정을 거치면 특정 장기를 이루면서 그 기능을 발휘한다. 세포 안팎의 환경에 따라 특정장기 기능에 맞는 유전자는 더욱 활발하게 발현되고 그렇지 못한 세포는 휴면상태에 놓이면서 장기가 형성된다. 입은 입의 역할을 하고 손발은 손발의 역할을 하고 뇌와 심장은 뇌와 심장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왜 그렇게 분할하는지 그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많은 생물이 탄소, 수소, 질소, 산소를 중심으로 많은 원소가 결합하여 각기 고유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다. 어느 개체 하나 같은 것이 없다. 각 생물 속에 잇는 장기는 각자 자기의 역할을 하여 개체가 존재하는데 지장이 없게 계속 대사하고 호흡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각 생물은 각자 자신의 시공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며 서로 어울려 생존한다. 이 얼마나 오묘한 진리인가. 필자가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대로 별, 태양, 빛, 에너지 삼라만상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느님이 만드신 이 우주도 하느님이 만드신 진리와 규범 그리고 절차를 따라 순응하며 운항한다. 모든 생물이 그렇게 살고 모든 세포가 그렇게 분화한다. 이 모든 것이 사랑과 어울림의 모습이다.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태어나면서부터 그 진리가 무엇인지 알려주셨고 예수님은 어떻게 따라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그리고 항상 일깨워주신다. 그런데 겨우 수정란 하나에서 태어난 인간을 모든 생물의 먹이 고리 위에 위치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더니 창조주 하느님의 진리를 외면한다면 말이 되는가. 서로 싸우고 죽이고 짓밟고 빼앗고 거짓하고 교만한 삶을 산다면 말이 되는가. 이제는 환경까지 파괴하여 삶의 터전으로 마련해 주신 지구마저 온난화시키고 괴멸시켜서는 말이 되는가. 각자가 자신의 처지에 맞게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이 가르쳐주신 삶을 실천하여야 한다. 예수님의 몸을 나누어 먹고 한 몸이 되어 서로 사랑해야 하고, 각자의 환경과 처지에 맞게 욕심을 버려 예수님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우리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 각자의 처지에 맞게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우주 모든 창조에 기여해야 한다. 우리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히 시공을 초월하여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국일현(그레고리오·원자력연구소 책임연구원·과학기술부 원자력안전전문위원)

입력일 2007-11-04

[과학의 눈으로 본 신앙] 17.동물의 왕국

무엇이 ‘바보’인가? 예수님은 지구상에서 가장 척박한 땅 이스라엘의 사막 한 가운데 작은 촌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이스라엘은 당시 로마의 식민지이었다. 우리나라 독자는 일제 통치 역사를 통해 식민통치의 이스라엘 국민이 당시 얼마나 치욕스런 삶을 살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그 식민지배하에서도 더럽고 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말먹이 통 구유에 눕혀졌다. 가장 아랫자리에 태어난 셈이다. 이것이 하느님의 선택이다. 몇 해 전 기회가 있어 이스라엘을 여행할 수 있었다. 어디를 가나 모래이었고 물이 귀했다. 물 공급원이라고는 해발 1km 이하의 갈릴래아 호수가 전부이었다. 호수에서 끌어올린 물을 고무 수로를 통해 전국에 분배하고 있었다. 지금은 수로와 파이프를 통해 갈릴래아 물을 쓰지만 옛날에는 물을 찾아 이리저리 옮겨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도 베두인들은 처참한 사막의 거지 하이에나 그대로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당시 헤로데가 살았다는 궁궐을 보니 호화로움이 극을 달했고, 그 때문에 수탈당했을 서민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믿지 않는 이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동물의 왕국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과 복음의 진위를 의심하고 그 역사적 사실을 따진다. 더구나 하느님이 사람으로 육화되어 오셨다고 하면 고개를 돌린다. 시작부터 하느님을 자신들과 똑같은 존재선상에 놓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로또 복권을 사고, 증권을 하면 대박이 나기를 기다리며 기적을 바란다. 그러다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늙어갈 때 비로소 하느님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지고 힘이 들어 도움을 청할 정도로 절박하면 하느님을 찾는다. 사람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많은 사람들의 대인관계를 보면 매우 이기적인 면을 볼 수 있다. 마치 동물을 닮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을 판단하는데, 그 사람 됨됨이가 어떤가 보다는 재산, 주변 인물, 생김새, 차림새가 어떠한지 외적인 요소를 더욱 중요시하는 것을 발견한다.저 사람을 내가 얼마나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이다. 결혼 적령기의 남녀가 만나면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 어느 회사에 다니는가, 부모는 무엇 하는 사람인가, 재산은 얼마나 되는가?’ 등을 따진다. ‘조건’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주요 관점인 것이다. 사람 됨됨이 또는 대인 관계나 사고방식 등을 따져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렇게 만나는 사람마다 이용할 가치를 따지는 사람은 모든 삶을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구도와 연결하여 생각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어떻게 하면 내 삶을 기름지게 하는데 도구로 사용할까?’하는 가치로만 생각한다. 오늘도 본능에 충실하여 다른 동물을 먹이로만 생각하는 사자와 하이에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목을 물고 잡아먹는다. 세례자 요한의 목을 딸 선물로 삼았던 헤로데와 그 추종자, 동족을 수탈하고 고문하며 자신의 이익을 구했던 일제 추종자들,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 살면 되는 현대인들…. 그들 눈에는 수도원의 수도자, 가난한 이들을 돕는 봉사자, 평생 하느님께 봉사하는 성직자가 바보로만 보인다. 그렇다면 남을 돕고 내어주는 삶은 바보이고 빼앗고 짓밟는 삶은 영리한 삶인가? 다시 예수님을 묵상해 본다. 예수님은 가장 가난하게 태어나셨고 가난하게 돌아가셨다. 마지막에는 온 몸에 걸친 것 하나 없이 많은 사람 앞에 죄인처럼 온갖 수모와 고통을 겪으며 죽었다. 그리고 가진 것 모두를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밀떡의 모습으로 바뀌어 오늘도 오신다. 죽기 전에 예수님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이것은 나의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며, “이것은 나의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명령하셨다.(1코린 11, 24~25) 우리는 무엇보다도 소중히 이 예식을 행한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어라. 아직도 굶주린 하이에나나 사자처럼 나 자신의 이익과 본능만을 위하여 먹이를 쫓아 하느님을 짓밟고 살아야 하겠는가. 국일현(그레고리오·원자력연구소 책임연구원·과학기술부 원자력안전전문위원)

입력일 2007-10-28

[과학의 눈으로 본 신앙] 16.선택

나를 버리는 사랑 “우주(코스모스)를 정관(靜觀)하노라면 깊은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그 때 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아득히 높은데서 어렴풋한 기억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주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한다.” - 칼 세이건, 1980. 마치 쏟아져 내릴 것 같다. 깜깜한 밤에 바다나 깊은 산중에서 바라 보는 하늘의 별에선 신비감마저 느껴진다. 별이 반짝이는 것은 거기서 핵융합으로 수소가 태어나고, 탄소, 질소, 산소의 사이클로 수많은 원소가 태어나면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내뱉는다는 증거이다. 결국 우리가 별을 바라본다는 것은 새로운 원소가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창조의 현장’을 보는 것이다. 생명은 지구에만 있을까. 이 궁금증을 위해 20세기말, 미국과 러시아는 많은 우주 탐사선을 외계에 내보냈다. 그 결과 태양계에서는 유일하게 지구에만 물과 생명이 있음이 확인됐다. 목성과 토성은 물론이고 화성, 수성도 원소가 다양하지만 물과 생명의 씨앗이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더 나아가 우주 통신 결과, 우주 어디에도 생명의 씨앗이나 움직이는 생명의 파동과 존재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몇 달 전 이글에서 언급하였듯이 현재로선 우주에는 유일하게 지구에만 생명이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 이것이 현실이고, 현재이다. 고구려가 망하지 않고 고토를 회복했으면 지금 우리나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존재는 이미 수많은 상태의 가능성 중의 하나로 선택되었고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매순간 선택해야 하고, 또 그 결과에 따라서 현재가 있다.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현재의 우주, 지구, 생명, 생태계, 인간, 나와 이 글을 읽는 독자의 현존이 이미 선택되었고 그 존재는 변할 수 없다. 우주 만물의 현존재는 가장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상태이고 하느님의 유일한 진리로 지배된다. 현존 전체가 하느님 사랑 속에 아울러진 상태다. 그러나 그 현존은 하느님이 선택하신 하나의 상태일 뿐이다. 사실 과거의 시공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주 모든 존재는 오늘의 시간과 공간이 있기까지 너무도 많은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미래의 선택’이다.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듯이 하느님께서 그 미래를 선택하시면서 동시에 우리에게도 선택을 제안하고 계신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한 6, 51) 예수님은 삶을 주는 먹이요, 생명의 근원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먹어 시공을 초월한 생명을 얻으라고 선택을 요구하신다. 하느님은 인간과 현존을 창조하는 선택을 하셨는데, 이제는 반대로 인간이 하느님을 먹고 새로운 생명을 얻으라고 선택을 제안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주의 질서의 새로운 면을 제시하는 중요한 단서와 존재의 이유를 제공한다. 그러나 선택을 당하고 선택을 해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한 법칙을 두고 그 이론에 대해 토론하려면 쌍방이 그 이론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어야 의사소통이 된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대화를 하려고 해도 같은 언어로 대화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의사를 교환할 수 있다. 하느님이 오늘의 우주만물과 우리를 왜 선택하셨는지, 또 예수님이 우리가 왜 자신을 먹고 생명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기본 지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로 대화하기 위한 공통분모를 준비해야 한다. 그 공통분모는 나를 버리는 사랑이다. 예수는 모든 이를 위하여 스스로를 버리고 모든 이에게 따라서 사랑하기를 가르치셨고, 자신을 먹고 하나가 되어 생명을 얻으라고 제안하셨다. 그러나 하느님 뜻을 이해하고자 하면 현존하는 세상의 이치를 알고 하느님이 나를 선택하셨듯이 내 안에 그 분을 모셔야 그 뜻을 알게 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하느님이 제시하신 새로운 질서가 무엇인지 같이 느끼고 대화하기를 제안한다. 국일현(그레고리오·원자력연구소 책임연구원·과학기술부 원자력안전전문위원)

입력일 2007-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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