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일요한담] 고통 속의 기다림 / 정민

정민 안드레아(한국언론진흥재단 경영기획실장)
입력일 2022-11-22 수정일 2022-11-22 발행일 2022-11-27 제 3320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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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 통증이 있습니다. 감기처럼 시작되는데, 전신 경련을 동반하며 빠르게 폐렴으로 옮겨갑니다.”(92쪽)

“JFK 국제공항이 전염병 비상경보로 인해 검역에 들어갔습니다.”(154쪽)

“호텔 로비에서만 그는(슈퍼 전파자) 일곱 명을 감염시켰는데, 호주에서 온 한 가족을 포함해 일본 비즈니스맨 한 명 그리고 세 명의 러시아인이 그들이었다. 극심한 호흡 곤란과 발열에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중간에 프랑크푸르트와 애틀랜타를 경유했으며 그로인해 … 수천 명의 사람들과 접촉할 수밖에 없었다.”(251쪽)

코로나19 팬데믹을 전하는 언론보도가 아닙니다. 글은 작가의 상상으로 쓴 소설 중 일부입니다. 게다가 코로나19 확산 시기보다 6~7년 앞서 썼습니다. 독일인 소설가 피체크가 2013년에 쓴 「노아」(NOAH, 한효정 역, 자음과 모음, 2019)라는 작품입니다. 소설에서, 아시아에서 시작된 감염병이 세계를 휩쓸고 치료제 개발과 판매에 음모론이 퍼지는 상황이 현실과 닮아 소름이 돋았습니다. 비슷한 감염병 사례가 있었다지만 작가의 예견이 탁월합니다. 뜻밖의 반전과 스릴, 긴박감 속에서도 맺는 결말은 다소 헐겁습니다. 실상과 달리, 감염병의 시작이 ‘소설 같은’ 음모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인 ‘노아’에 주목합니다.

대림 제1주일 복음은,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라고 전합니다. 소설에서, 감염병 발발의 배경으로 개연성을 높인 것은 기후위기와 인구폭발에 직면한 지구의 상황입니다. 저는 작가가 주인공의 이름을 ‘노아’로 쓰고 제목으로까지 뽑은 의도를 눈치챕니다. ‘홍수 이전의 무지몽매한 사람들’과 ‘현재의 우리’가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서겠지요.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정영목 역, 해냄, 2019년 개정판)에 나오는 감염질병은 ‘실명(失明)하는’ 병입니다. “순식간에 하얗게 변하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眼) 질환”이 전염된다는 가정은 상상만으로도 공포입니다. 소설에서, 순식간에 초토화된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격리 수용소에서의 삶은 차라리 아비규환입니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악함과 욕망의 배설, 나약함, 이기심뿐입니다. 잃어버린 시각을 대체하는 것은 후각과 청각의 고통스런 최대치입니다. 절대적인 절망 그 자체입니다.

물론 희망이 있습니다. 소설의 끝에서, 주인공 일행이 수용소를 나와 각자의 집에 돌아갔을 때, 여전히 ‘쓰고 있는’ 작가를 만납니다. 물론 눈이 먼 그는, 글의 위 아랫줄이 겹치더라도 계속 쓰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기 자신을 잃지 마시오. 자기 자신이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마시오.”(「눈먼 자들의 도시」, 416쪽)

그렇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고통을 햇수로만 3년을 겪은 우리가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나 자신’입니다. 2022년 대림 시기를 시작하면서, ‘깨어나’ 그분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노아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정민 안드레아(한국언론진흥재단 경영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