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죽음을 넘어 희망하는 것 / 고계연

고계연 베드로 전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
입력일 2022-11-01 수정일 2022-11-01 발행일 2022-11-06 제 3317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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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임인년 한 해가 쏜살같이 흘러 11월로 접어들었다. 1년의 끝자락에 다다르자 찬바람 불고 쌀쌀한 기온 탓에 우리는 옷깃을 여미게 된다. ‘만산홍엽’ 가을 단풍도 이젠 추풍낙엽 신세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붉은 꽃 없다’는 선현들의 가르침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계절의 바뀜에서 보듯 자연의 변화는 자연스럽고 정연하다. 그러니 작게는 우리들의 한해살이, 길게는 인생의 기승전결을 돌아보게 된다.

지난주 초등학교 동창의 부음을 접했다. 그는 젊었을 때 울산 현대자동차의 근로자로서 부족함 없이 살았는데, 십여 년 전 그를 덮친 것은 골수암이었다. 1차 골수 이식으로 건강을 다소 회복했으나 긴 투병 생활은 그의 몸을 서서히 망가뜨렸고 환갑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의 죽음이 예고된 것이라면 지난 8월 선종한 배 토마스는 그야말로 급서였다. 지병이 없었는데 뇌경색으로 쓰러져 손쓸 틈이 없었다고 했다. 정의감에 불탔던 그의 호방한 목소리와 환한 미소가 지금도 그립다.

친구와 지인의 별세를 보면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처분이 엄연하고 두렵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 몸가짐을 조심하게 된다. 나는 곡식과 재물을 쌓아둘 큰 곳간만을 탐하지는 않았는지? 하느님 앞에서 부요하기보단 인색하지 않았는지? 그분의 생명의 말씀과 계명을 제대로 실천하고 살아왔는지?

마침 지난 2일은 가톨릭교회가 정한 ‘위령의 날’이었다. 교회의 전례력 안에서 모든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All soul’s day)로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정성껏 기도하는 날이다. 특히 교회는 이달을 ‘위령 성월’로 지내며 연도를 바친다. 연옥에서 정화한 속죄 중인 영혼들이 천상교회로 올라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다름 아닌 산 사람의 기도, 선업(善業)과 희생에 힘입어야 한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11월의 첫날을 ‘모든 성인 대축일’로 기념하는 까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리스도인들은 ‘성인들의 통공 교리’를 믿으며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따르려 한다. 즉 천상 성인들에게 그들의 영광을 축하하고, 아직 현세에서 순례 중인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전구해 주시기를 청한다. 또한 믿는 이들이 죽음 뒤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깨우쳐주는 의미도 있다.

죽음을 기억하도록 일깨워주는 세 가지 격언이 있다. 라틴어 두 단어로 쓰인 짧은 구절로 모두의 귀에 익숙하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까르페 디엠’(carpe diem), ‘아모르 파티’(amor fati)가 그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매 순간 기억하고, 현재를 가치 있게 살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세 경구를 매일 소리 내서 읽어보거나 노트에 또박또박 적어보면 어떨까. 항상 겸손하고, 지금 여기에 집중하여 즐기며, 내 운명을 받아들이는 좌우명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죽을 터이고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지상에서 단 한 번뿐인 삶이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으로 끝난다면 마치 블랙홀 같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참으로 허망한 노릇이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활이라는 든든한 동아줄이 있다. 이승을 떠나더라도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리라는 희망 말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위령 감사송 1 일부)

고계연 베드로 전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