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44)오래된 시간, 어머니, 시(詩)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2-10-05 수정일 2022-10-05 발행일 2022-10-09 제 3313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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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위로하지 못했던 어머니 세대 여성들을 기억합니다
자신의 삶 표현 못했던 어머니들
모든 어머니들이 생각과 감정을
자유롭게 말하고 쓰기를 희망
신학도 세상과 삶 정확히 읽고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길

어촌지역의 한 여성이 일을 하고 있다. 가족들을 뒷바라지하면서 자신을 말하지 못하고 위로하지 못했던 어머니 세대 여성들의 삶을 기억해야 한다.

■ 명절, 고향, 시집

시집을 사서 읽는 일은 나에게 일종의 의례(ritual)입니다. 인터넷 서점에서 신간 시집들을 검색하는 일은 작은 즐거움입니다. 지난 9월 초에 세 시인의 신간 시집을 샀습니다. 문정희 시인의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 진은영 시인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정화진 시인의 「끝없는 폭설 위에 몇 개의 이가 또 빠지다」 입니다. 문정희 시인과 진은영 시인은 그들의 시집이 나올 때마다 거의 사는 편이었지만, 정화진 시인의 시집은 처음이었습니다. 시인 소개란에 적힌, “1959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라는 문구 때문이었습니다. 추석 명절 부근이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동향과 동년배의 여성 시인이 어떤 생각과 정서로 살아왔는지 궁금했습니다. 28년 만에 세 번째 시집을 출간했다는 사실도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내친김에 그의 첫 시집 「장마는 아이들을 눈뜨게 하고」와 두 번째 시집 「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를 함께 주문했습니다.

추석 명절 동안 내내 혼자 있었습니다. 조용한 연휴 기간에 밀린 숙제들을 하며 틈틈이 시집을 읽었습니다. 정화진의 시집을 읽으며 고향, 어머니, 유년의 기억, 시간의 흐름을 생각했습니다. 1990년에 나온 첫 시집에서 시인은 “그 지난함과 캄캄한 세월의 강을 건너온 연로하신 어머니께 이 작은 시집을 올린다”고 썼습니다. “상주군 외서면 우산리 청산촌 근암댁 안마당에 익모초가 짙푸르다.”(‘나의 방은 익모초 즙이 담긴 사발이다’) 시 안에서 낯설지 않은 지명 하나 만나도 괜히 반가웠습니다. 사람은 사소한 연결 하나에서도 인연의 고리를 찾는가 봅니다. 시인이 고향을 떠나 자기의 생을 어떻게 견디고 어떤 시간의 무늬를 그리며 살아갔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물론 시는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문학 전공자가 아닌 저는 시에서 미학적 측면보다는 삶의 물결이 그려내는 흔적에 더 마음이 머뭅니다.

‘고향’이라는 말은 흐르는 세월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고향을 추억할수록 뭔가 더 막막해지는 나이에 이르렀습니다. 중년의 나이에 기억하는 고향과 노년의 나이에 회상하는 고향은 확실히 다른 느낌으로 옵니다. 노년에 기억하는 고향은 이제 더 이상 “어린 시절이 숨어 있던 은유의 커다란 옷장”(진은영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이 아닙니다. 유년 시절은 아득한 기억의 저편이 되어버렸습니다. 구체적 기억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흐릿하고 저밋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세월의 폭이 그만큼 길고 멀다는 뜻입니다. 이 시차를 큰 폭으로 경험할 때 가끔 숨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지난 시절의 사진들을 게시하는 페이스북 사이트가 있습니다. 아,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그 시절을 지냈지 하는 사진들을 볼 때마다 설명할 수 없는 옅은 슬픔이 밀려옵니다. 돌아갈 수 없는, 그 길고 먼 시차의 간격이 이상한 조급함을 낳습니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이제 많지 않다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징징거리지 말고 의연하게 늙음을 수용해야 한다고 마음으로 늘 다짐하지만,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살짝 흐트러지는 자신을 봅니다. 늙어갈수록 더 많은 공부와 성찰과 수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 세상 모든 어머니들의 삶

여성 시인의 시집을 읽을 때마다 여성들은 세상을 어떻게 읽고 어떤 정서와 반응으로 살아가는지 유심히 살펴봅니다. 정화진 시인에게 강 하구와 바다의 풍경은 생의 흐름을 보여주는 주요한 이미지입니다. “저 강의 하구에 물컹거리는 무덤들의 바다가 있다.”(‘고요한 동백을 품은 바다가 있다’) “강물은 첩첩이 결을 이고 하구 쪽으로 몸을 흔들며 나아갔다/ 바다는 한 장의 들판이다.”(‘쑥대머리 아득한 나무 장례식’) “모래톱의 흔적은 기다림이 주르륵 밀린 자리 같다.”(‘강변 그 세 겹의 무늬’) 누구에게나 시간은 흘러가고 삶은 고단하지만, 자신의 말과 글을 갖지 못한 우리 어머니 세대 여성들의 삶은 잊혀져 갑니다. “가엾은 어머니들의 생애가 밀려가 있는/ 뻑뻑하고 검붉은 육체들이 펄렁대는 강의 하구”(‘무수한 분묘이장공고를 나부끼는 바다’)였지만, “풍경의 외곽으로 여자들의 기구한 생애가 삭제된다/ 거무스름하게 거친 문장 사이 마모되기라도 한 듯”(‘고정된 풍경’)이 말입니다.

세상의 삶과 역사는 “늙은 여인들이 삭제된 풍경”(‘습지의 머위처럼’)처럼 보이지만, 생의 구석진 자리에서 제 생을 끌고 온 어머니(여성)들에 의해 세상은 유지되고 흘러갑니다. “비녀를 지른 듯한 여자들이/ 한 무리 부엌 아궁이 곁에서/ 우두커니 낱말이나 문장을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불기도 구원도 없는 부엌을 지키고 있다// 수세미로 문지른 듯 줄무늬 투성이인 늙은 문장이 어눌하게 꿈틀대며 그 부엌문을 나온다.”(‘불완전한 문장’) 사실, 저의 신앙과 사제적 삶에도 어머니의 헌신과 기도가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어머니가 지금의 제 나이 때에 무슨 생각과 어떤 즐거움으로 살아갔을까 궁금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듣고 보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평범한 생의 사람이라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말과 글로 표현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들의 삶은 침묵 속에서 사라져갔습니다.

■ 읽고 쓰는 삶

시인은 읽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정화진 시인 역시 읽고 공부하면서 그 긴 공백의 시간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시인은 섬세하고 정밀하게(‘정밀의 책’ 참조) 자기 삶을 읽고 공부합니다.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도처에, 그가 읽은 책과 글의 편린들이 가득합니다. 읽기는 공감과 변주를 통해 새로운 삶을 상상하게 해줍니다. “그의 문장과 호흡이 내가 늘 사용하던 문장 위에 겹쳐”(‘무릎 위의 고양이’)지고,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라는 신형철의 문장은 “사랑은 발명되지 않았고/ 길게 연장되었지”(‘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어’)라는 표현으로 변주됩니다. 시인은 읽는 삶을 통해 “시간의 해일”과 생의 가벼움을 견뎌온 것 같습니다.

쓴다는 것은 자신을 기록하고 돌보는 일입니다. 정화진 시인은 “할머니, 저는 늘 잘 보이지 않는/ 저를 기록합니다”(‘불에 탄 어금니’)라고 고백합니다. 진은영 시인은 “그러니까 시는/ 시여 네가 좋다/ 너와 함께 있으면/ 나는 나를 안을 수 있으니까”(‘그러니까 시는’)라고 노래합니다. 자신을 말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로하지 못했던 어머니 세대 여성들의 삶을 기억합니다. 그들이 하늘에서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정서와 욕망을 자유롭게 말하고 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자신의 생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신학도 세상과 삶을 정확하게 읽고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합니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