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신앙선조 발자취 담긴 순우리말 성지·본당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2-10-04 수정일 2022-10-04 발행일 2022-10-09 제 3313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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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예수님 명칭 비롯한
박해와 순교 역사에서 유래
선조들의 신심 엿볼 수 있어

해미국제성지가 있는 ‘여숫골’은 예수님이라는 의미의 여수에 마을을 뜻하는 골을 더한 형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10월 9일 한글날에는 많은 이들이 한글로만 표현할 수 있는 순우리말을 찾아보고, 한글의 소중함을 기억하곤 한다. 아름다운 순우리말이 많지만, 우리 신앙이 담긴 순우리말 단어들도 있다. 여러 성지·본당 등에는 하느님, 예수님의 이름이 담긴, 또 신앙선조의 삶과 행적이 담긴 순우리말이 전해지고 있다.

신앙이 담긴 순우리말 중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담긴 지명들이 눈길을 끈다. 던지실은 천주이신 하느님의 이름에서, 여사울, 여숫골 등은 예수님의 이름에서 온 순우리말 지명이다.

수원교구 던지실본당의 명칭은 지역의 옛 이름인 ‘던지실’에서 왔다. ‘던지실’이란 말은 ‘천주 마을’이라는 뜻에서 생겨난 이름이다. 천주교가 중국에서 전해질 당시 천주(天主)의 중국어 발음인 ‘텐쥬’가 시간이 흘러 ‘던지’라는 말로 변했고, 거기에 마을을 뜻하는 ‘실’이 붙어 ‘던지실’이라는 말이 형성됐다. 실제로 던지실본당이 자리한 안성지역에는 오래된 공소가 많다.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생가 터가 있는 여사울성지의 ‘여사울’은 ‘예수 마을’이란 이름에서 변형된 명칭이다. 「송담유록」에는 여사울이 ‘여소동(余蘇洞)’과 ‘야소동(邪蘇洞)’으로 표기되는데, ‘야소(邪蘇)’ 또는 ‘야소(耶蘇)’는 예수의 한자식 표기다. 초기 신앙선조들은 필사본에 예수님을 ‘녀슈’ 혹은 ‘여슈’로 적었다. 우리나라 초기 신자들은 예수님을 ‘여수님’이라 부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해미국제성지가 자리한 일대를 일컫던 ‘여숫골’도 예수님이라는 의미의 ‘여수’에 마을, 고을을 뜻하는 ‘골’을 더한 형태다.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신자들의 기도 소리를 주민들이 ‘여수머리’라 듣고 ‘여숫골’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은하수의 순우리말인 ‘미리내’는 박해를 피해 오지에 숨어든 신자들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은하수처럼 보여 이름이 붙여졌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미리내, 갓등이 등의 지명에서는 신앙선조들의 삶과 신앙이 묻어난다.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묻힌 미리내성지는 미리내 교우촌의 이름을 따왔다.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산골짜기를 따라 자리한 신자들의 집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마치 하늘의 은하수 같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다. 미리내는 은하수의 순우리말이다.

수원교구 왕림본당의 전신인 ‘갓등이 공소’에서 ‘갓등이’는 박해시대 신자들이 선교사를 부르던 일종의 은어다. 갓등이 공소는 뱃길로 충청도를 통해 입국한 선교사들이 서울로 가기 전에 머물던 곳이다. 신심 깊은 이곳 신자들은 선교사를 보호하기 위해 선교사를 ‘갓을 쓴 등불’이란 의미로 ‘갓등이’라 비밀스럽게 부르며 보호했고, 그런 이유로 교우촌에 ‘갓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두들기와 진둠벙은 순교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단어들이다.

죽산성지 인근 지역에는 ‘두들기고개’가 있다. 죽산은 조선시대에 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신자들의 처형이 이뤄졌던 곳이다. 포졸들은 신자들을 호송하면서 삼죽과 죽산의 분수령인 고개를 지났는데, 이때 신자들이 가족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하며 땅을 치고 두들겼다고도 하고, 포졸들이 신자들을 두들겨 때려 끌고 갔다고도 전해진다. 이런 모습에 ‘두들기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역이 개발되면서 ‘두들기고개’의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지금도 삼죽면에는 ‘두들기길’, ‘두들기삼거리’ 등의 지명이 남아있다. 죽산성지 입구에 세워진 큰 표지석이 이 ‘두들기’에서 옮겨온 바위로 제작됐다.

해미국제성지에 있는 진둠벙은 신자들이 신앙 때문에 생매장을 당한 곳이다. 박해 당시 형졸들은 수많은 신자들을 묶은 채로 이곳 물웅덩이에 수장시켰다. 충청 지방 방언으로 웅덩이를 ‘둠벙’이라 하는데, 죄인들이 빠져죽은 둠벙, 바로 ‘죄인둠벙’이란 말이 ‘진둠벙’으로 변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