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한담

[일요한담] 성모님의 손(5) / 한경옥

한경옥 마르가리타(시인)
입력일 2022-09-28 수정일 2022-09-28 발행일 2022-10-02 제 3312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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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슬비가 내리는 어느 봄밤이었다. 지방에 다녀오느라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지하철을 탔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라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있어 누군가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눈에 뜨인다. 대부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나도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때, 옆 칸과 연결된 문이 열리고 허름한 차림의 젊은 여자가 느릿느릿 걸어온다. 그녀는 흘끗흘끗 사람들을 살피더니 내 앞에 와서 선다. 축축하게 젖은 그녀에게서 쿰쿰한 냄새가 난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입술을 달싹인다. ‘나에게 자리를 비켜달라는 건가? 자리도 많은데 왜 하필?’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귀찮아서 얼른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녀가 다시 내 쪽으로 다가서며 “사모님!” 하고 부른다. 뭐라고 속삭이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몸을 내 쪽으로 더 기울이면서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못 알아들었다고 또 고개를 흔들었다. 순간,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며 작지만 날카로운 소리로 “천원도 없어요?” 하고 쏘아붙이더니 빠르게 다른 칸으로 가버린다. 사람들의 눈길이 일제히 나에게 쏠린다. 나는 졸지에 봉변을 당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서야 사태를 깨달았다. 무슨 사정으로 도움이 필요했던 그녀는 전철 안에서 부탁하기 편해 보이는 사람을 찾아 이사람 저사람 살폈던 거다. 그 중에 내가 자기를 도와줄 만한 사람으로 보였나보다. 작은 소리로 내게 천원만 달라는 말을 했는데 내가 싫다고 고개를 저었다. 얼마나 민망하고 부끄러웠을까. 젊은 여자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돈을 달라는 말이 쉽게 나왔을 리 없었을 게다. 그럼에도 다시 용기를 내어 도움을 청했는데 내가 또 싫다고 고개를 저으니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큰돈도 아니고 단돈 1000원을 거절했으니…….

그이는 이 늦은 시간에 천원으로 무얼 하려고 했던 걸까? 집에 갈 교통비가 부족했나? 아침부터 비가 내렸는데 왜 우산을 안 챙겨 저렇게 젖었나? 혹시 노숙자라 아직까지 저녁을 못 먹었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내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간 칸의 문을 열고 그녀를 찾았다. 그녀가 없다. 그 다음 칸에서도 또 그 다음 칸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다시 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문이 열릴 때마다 그 쪽을 바라보았지만 끝내 오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 잠자리에 누워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설사 그녀가 구걸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더라도 그날만큼은 그녀에게 얼마라도 줬어야 했다. 따끈한 국물을 사 먹을 수 있도록, 아니면 찜질방에 가서 비에 젖은 몸을 말릴 수 있도록 만 원짜리 한 장이라도 쥐어줬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녀도 나도 푸근한 밤이 되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나는 가끔 그런 일을 겪는다. 그럴 때마다 망설임 없이 얼마라도 내민다. 내가 유난스레 착해서가 아니다. 내 형편이 넉넉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궁금해 할 일은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들의 눈에 내가 자기를 도울만한 사람으로 보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믿는다. 내가 착하게 살지 못하니 나를 사랑하시는 성모님께서 한 번씩 보속(補贖)을 주시기 위해 그들을 보내시는 것이라고.

그날은 그렇게 성모님께서 내미신 손을 뿌리쳤으니 안타깝게도 나는 보속(補贖)의 기회를 한 번 놓쳤다.

한경옥 마르가리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