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밀알 하나] 눈치가 그렇게 없어요? / 정연진 베드로 신부

정연진 베드로 신부,홍보국 부국장
입력일 2022-08-09 수정일 2022-08-09 발행일 2022-08-14 제 3306호 3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한국사람 말은 곧이곧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가령 조카에게 용돈을 건네는데, 조카가 손사래를 치며 “아니에요, 삼촌 괜찮아요”라고 한다고 해서 “아, 그러니? 알겠어”하고 돈을 다시 넣는다면 그건 대참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삼촌은 다신 조카의 얼굴에서 웃음을 볼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이처럼 사람의 말 속에 가려진 진심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 인간관계를 수월하게 맺는 듯하다.

사목 현장 역시 마찬가지인데, 사람의 속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제가 본당 사목을 하기에 매우 유리하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할 때와 갈등 해소가 필요할 때, 방향 제시가 필요할 때와 정확한 업무지시가 필요할 때 등을 정확히 파악한다면 사제와 신자 모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본당 생활을 할 수 있다.

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나는 어느 쪽에 가까운 사람일까? 슬프게도 내가 정말 많이 들은 말 가운데 하나는 ‘눈치가 참 없다’는 것이었고, 눈물 콧물을 다 쏟아가며 본당 사목을 했었다.

어느 날엔 이런 일도 있었다. 본당에서 교우들 간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내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상황이 모두 종료되고야 말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전해 듣고 나서야 “헉!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라고 놀랐다. 하지만 더 크게 놀란 건 교우들이었다. “…진짜 모르셨어요?” “앗! 네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비난이 쏟아지자 나는 크게 주눅이 들고야 말았다. 죄송한 마음에 사제관에 들어가 머리를 쥐고 흔들며 자책했다.

시간이 흘러 이 사건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한 교우분이 내게 이런 위로의 말을 건네셨다. “힘내세요 신부님! 처음에는 그분들이 신부님께 티를 내고 눈치를 줘도 알아듣지 못하셔서 너무 답답했대요. 그런데 오히려 못 알아들으니까 신기하게도 알아서 마음 정리가 되셨다던 걸요!?”

분명히 말해두지만, 이것은 내가 계획한(선택한) 생존전략이 결코 아니다. ‘눈치 없음’으로 관계의 소란을 잠재울 만큼 치밀한 수를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만의 레이더를 가동하여 봉사자들을 유심히 살펴보지만, 어김없이 상처받고 떠나가는 봉사자들이 발생하고야 만다. 눈치 없음은 상황을 호전시키기는 묘수로 빛나기도 하지만, 상황이 악화하도록 방치하여 걷잡을 수 없는 파멸의 길을 가게 하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모두 아셨다. 그런데도 제자들을 이끌 때는 그들의 속마음을 아시면서도 모른 척하실 때가 있으셨다. 하지만 필요한 때에는 그 속마음을 두고 따갑게 질책하시면서 그들이 올바른 길로 가도록 이끌어주셨다. 그러니 나의 바람이 있다면, 속마음을 잘 헤아리는 사목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해 끙끙 앓다가 속이 곪아 터지는 봉사자가 없도록 내가 먼저 그들의 속을 읽고 싶다. 직접 개입할 수 없을지라도, 은근히 옆에서 상황을 정리해주는 지혜로운 사람이고 싶다.

음, 가만 있어보자. 바랄 걸 바라야 하나? 나도 참 눈치가 없다.

정연진 베드로 신부,홍보국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