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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 원로 주교의 삶과 신앙] 3. 최창무 대주교(4)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22-07-19 수정일 2022-07-19 발행일 2022-07-24 제 3304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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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안전하게 살아왔는가
인생에서 경험한 첫 사회생활, 군복무
상황은 열악했지만 회심의 기회로 남아
독일 도착하자마자 어학·교과 동시 시작
한국서 아쉽던 성서신학 등 신나게 공부

사제서품식은 1963년 6월 9일 독일 프라이부르크 주교좌대성당에서 거행됐다. 사진은 6월 23일 독일 성베드로바오로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는 최창무 신부(가운데)의 모습. 광주대교구 제공

전쟁 후 모두들 참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사제양성은 로마 교황청 후원과 해외 각국 교회 장학금 등의 지원을 받아 할 수 있었고요. 하지만 신학교에서 넉넉한 건 사람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신학생들도 닭과 돼지 등을 키워 자급자족하려 애쓰고 교우들은 성미운동 등을 해서 학생들의 먹을거리를 보태줬지만 늘 부족했죠. 해외유학은 사제양성에서 중요한 한 과정이기도 했지만, 사실 당장 먹을 입을 줄인다는 면에서도 절실한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유학을 가기 위해선 군복무를 하고, 해당 국가 언어와 국사가 포함된 국가고시를 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군대생활이 제 인생에선 처음 하는 사회생활로서 의미가 컸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신학생으로만 살았는데, 모라토리움(일종의 현장 실습) 조차 없던 시기였거든요. 그땐 교구 소속 사제를 ‘재속사제’라고 했는데요, 저는 사회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수도사제’가 돼야 하는 건 아닌지 갈등하기도 했답니다.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갔지만, 내무반 생활수준은 너무나 열악했습니다. 무엇보다 폭력을 일삼고 갖가지 생활고를 겪던 이들이 한데 모인 곳이라 하루하루 생활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제일 ‘쫄병’이 신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괴롭힘을 받기도 했고요. 하지만 바로 그 시간이 제 인생에선 깊은 회심의 기회였다고나 할까요. 고통스러웠던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하는 시간으로 남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몇몇 선임병들을 보면서 내심 ‘난 그들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어. 저들과는 다른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의 벽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인이란 범죄의 기회를 갖지 못한 이들’이라는 말이 있죠. 척박한 군대생활 중에도 ‘평생 처음으로 하루 세끼 걱정을 하지 않는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보며, ‘나는 신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안전하게 또 혜택을 받으며 살아왔는가’ 돌아보게 됐습니다. 게다가 상대를 진심으로 대하고 이웃으로 받아준 사람은 제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에선 가장 불우하게 살았던 이들이었습니다.

군인 최창무는 27사단 79연대에서 480주특기(재봉사) 병사로 근무했다.

한번은 나쁜 짓을 일삼는 선임병이 하도 돈을 꿔달라고 조르는 통에 꽁꽁 숨겨둔 비상금을 내준 적이 있었거든요. ‘뺏겼다’라는 심정으로 억지로 내놓았고 돌려받지 못할 거라고 단정했었죠. 그런데 뜻밖에도 빈털터리가 되니까 오히려 자유로워지는 걸 체험했습니다. 게다가 돈을 빌려 간 이는 제가 갑자기 전역한다는 소식을 듣자 급히 돈을 구해 한밤중에 저에게 주는 겁니다. 저의 생각과 달리 약속을 지키려고 끝까지 애쓰는 그 모습을 보고 부끄러웠습니다. 천국과 같은 노아의 방주 안에서만 지낸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군대에서 그런 체험을 하지 못했다면 저는 머리로만 혹은 말로만 하는 사목을 할 수도 있었을 테죠.

전역을 하고 출국준비를 하던 시간은 설렘이나 두려움이 아닌 초조함 그 자체였습니다. 5·16 군사정변의 여파로 항만이 봉쇄되고 신원 조회를 거쳐야 출국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정해진 기간 내에 유학을 떠나지 못하면 다시 군대로 돌아가야 했고요. 3개월을 넘게 기다려 출국 만료일까지 불과 열흘 남짓 남았을 때 드디어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유학생을 위한 독일어 어학수업을 따로 거칠 틈도 없이, 어학과 교과과정을 동시에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시험은 라틴어로 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가능했죠. 유학생활이 고단하거나 어렵다는 그런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없이 그야말로 정신없이 공부했습니다. 한국에서 늘 아쉽게 생각했던 성서신학과 교회사 등도 신나게 배웠습니다. 성경과 신학 전반에 대한 안목이 넓어지면서 더욱더 신나게 공부했고요.

저는 원래 영성신학을 전공하고자 했습니다. 교구 사제로서 영성적 기틀을 더욱 다지고 성숙한 모습을 갖추길 원했거든요. 동시에 세속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성숙을 위한 신학 연구를 하고 싶었습니다. 사제로서 평신도들에게 어떻게 영성적으로 더욱 도움을 줄 수 있을까가 최대 관심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럽 여러 교회에서 온 장학금을 분배하는 제비뽑기에서 저는 뒤로 밀렸고 남은 곳이 독일이었기에 독일로 유학을 갔습니다. 아쉽게도 독일 교과 과정은 윤리신학 안에서 영성신학을 다루는 체제였어요. 하지만 조직신학으로서의 윤리신학 원론과 사회윤리, 실천윤리(카리타스)가 통합된 윤리신학 과정을 배우면서 오히려 신학 전반을 통합적으로 관망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정리 주정아 기자 stell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