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특별기고] ‘김대건 신부 초상’ 발굴과 과제

이원복 치릴로 도광포럼 대표·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입력일 2022-07-12 수정일 2022-07-14 발행일 2022-07-17 제 3303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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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혁신 함께 녹아든 종교화… 장발 화백 총체적 재조명 절실
배경 속의 인물·하늘 향한 시선 처리 등 새로운 시도 드러나
서구 및 동아시아 성화 화풍과 공통점·독자성 비교 검토해야
20세기 한국 근대 화단에서의 장발 화백 역할 규명 작업 필요

장발 화백이 그린 김대건 신부 초상화.

지난 7월 5일 수원교구청에서는 새롭게 발견된 장발(루도비코) 화백의 1920년 작 ‘김대건 신부 초상화’ 기증식이 열렸다. 이 초상화는 1920년에 장발 화백이 그린 김대건 신부 초상화가 두 점이라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고, 그해 5월 용산신학교 교장 기낭 신부 은경축 기념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초상화 발견은 최초로 김대건 성인화를 그렸으며 한국 가톨릭 미술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장발 화백의 작품을 다시 조명하는 계기로 부각되고 있다. 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이원복(치릴로)씨 특별기고로 초상화 발견 의미와 과제를 알아본다.

7월 5일 수원교구청에서 열린 김대건 신부 초상화 기증식 후 관계자들이 액자의 유리를 분리하고 캔버스를 노출해 색감과 필치 상태를 살펴 보고 있다. 맨 왼쪽이 필자.

■ 아! 김대건 신부 초상화

지난 6월 전기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오랜 벗 이충렬의 성 김대건 신부 정본 전기인「조선의 첫 사제 김대건」(김영사)이 발간됐다. 그리고 한 달도 되기 전 1920년 장발 화백이 약관에 그린 ‘김대건 신부 초상화’가 발굴돼 지면으로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학회지 게재를 위한 ‘장발의 김대건 신부 초상화 연구-1920년 作 초상화 두 점을 중심으로’ 논문 심사요청이 왔을 때, 가시적인 조형예술인 회화 관련 내용이었고, 정작 주제가 된 작품을 보지 않은 상태여서 조심스럽고 꽤 망설여졌다. 평론가나 미술사가는 작품을 읽거나 보기 전에는 글에서 언급하지 않음은 기본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논고를 접하니 전개와 고증이 논리적이어서 문제점을 찾기 어렵고, 본격적 작품 분석이 본령인 회화사 연구에 앞선 자료 발굴 성격이어서 심적 부담에서 다소 자유스러웠다. 이 논고를 발표한 분이 평소 안면이 있던 송란희(가밀라)씨란 사실에 기쁨은 배가됐다. 그녀의 요청으로 지난 7월 5일 수원교구청에서 열린 기증식에 참석해 ‘김대건 신부 초상화’를 만났다. 식이 끝난 뒤 유리를 분리하고 캔버스를 노출해 색감과 필치 그리고 상태를 세밀히 살폈다.

명화가 주는 감동은 순간에 그침이 아니다. 그것은 걸작이 지니는 생명력으로 기억할 때 되살아나니 감동은 진행형이다. 미술사가에게 좋은 작품을 만나는 ‘안복’(眼福)은 안목(眼目)에 앞서 몹시 중요하다.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그림이 탄생한다. 로댕의 조각은 제자 릴케에 의해 문자 언어로 새롭게 일반인에게 전달된다. 감동을 일반에게 전해주는 것은 학자들 몫이다.

1980년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에서 본 청대 교포 2세로 중국 전시대를 통해 4대 대수장가에 드는 ‘안기 초상’, 1985년 일본 네즈박물관에서 만난 화려 섬세한 고려불화인 ‘수월관음도’와 ‘지장보살도’, 2005년 일본 교토에서 조사한 ‘도갑사 관세음보살32응신도’ 등과 조우했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가슴을 뛰게 한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 초상은 또 다른 감격으로 이어졌다.

■ 조선, 초상의 나라

이즈음 우리나라 문화예술이 세계적인 관심사로 크게 부각되는 일련의 움직임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으로 전에 없던 일이다. 기원후 이슬람 문화권을 제외하고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500년을 견지한 조선왕조는 ‘초상화의 왕국’으로 지칭된다. 어질고 착한 민족의 자화상인 우리 초상화는 임금의 초상인 어진(御眞) , 조선왕조 28회 이루어진 공신 책봉에 따른 공신도상, 평상복 차림의 사대부상, 승상, 드문 여인초상 등으로 나뉜다.

인물화 분야에 속한 초상화는 신화시대의 영웅을 비롯해 고대국가의 성립 후 건국자와 지배자인 제왕상이 그림과 조각으로 제작됨은 인류의 보편적인 양상이다. 중국 한(漢)으로부터 포폄(褒貶)의 의미로 성군(聖君)만이 아닌 포악한 군주도 그렸다. 내세를 믿지 않으나 조상에 대한 존경이 각별했고 혈통의 대물림을 중시한 유교 국가에선 임금만이 아닌 선학(先學)과 선조(先祖) 초상화가 크게 발달했다.

조선후기 화단을 풍미한 남종문인화와 풍속화의 선구를 점하며 자화상을 남긴 조선후기 문인화가 윤두서(尹斗緖)(1668-1715)가 “터럭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一毫不似便是他人)”라고 말했듯, 머리카락이나 수염에 이르기까지 극사실적 묘사인 외모 표현은 기본이다. 이른바 전신사조(傳神寫照)가 말해주듯 보이는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인품, 학덕, 정신 등 내면까지를 드러내는 점에서 다른 나라와 구별된다.

■ 성 김대건 초상의 회화사적 의의 및 과제

이번에 발굴된 초상화는 장발(1901-2001) 화백이 약관에 그린 초상화다. 김대건 신부 순교 후 74년, 시복 5년 전, 시성 64년 전에 그린 최초의 초상이다. 작품의 됨됨이인 완성도와 별개로, 보면 볼수록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그간 시대를 달리해 스케치까지 포함해 6점이 확인된 장발 화백의 김대건 초상 중 가장 먼저 그린 점에서도 주목된다. 미화나 이상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평범한 인물로 표현된 얼굴은 한국인의 착하고 어진, 하느님께의 순명을 암시하는 마음 그대로를 잘 표현했다. 그가 20대 말, 80대와 90대에 그린 후광 있는 이상화된 초상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전통 초상과 구별되는 점은 배경 속에 인물을 등장시킨 점, 각기 종려나무 잎과 성경을 잡은 양손, 그리고 특히 조선 초상에서 중요시된 시선 처리 중 하늘을 향한 듯한 묘사에서 새로운 면들이 드러난다.

앞으로 보다 면밀한 연구를 전제로 이 초상화가 지니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이 초상화는 종교화 범주에 든다. 전통적으로 불교의 승상을 비롯해 조선 선비 상 등과의 상관관계 여부, 시대적으로 비록 캔버스에 유채이나 그 안에 잠재된 전통 미감의 계승과 혁신의 양 측면 모두를 주목하게 된다. 양식과 형식을 넘어 색감에서 화면 외형에 장식적인 부분에서 소재의 상징성 등 종교화의 특징과 함께 5방색적 요소도 감지된다.

둘째, 시계를 넓혀 장발 화백에게 영향을 준 서구 성화나 중국과 일본의 천주교 미술들과 화풍 측면에서 비교 검토가 요구된다. 동아시아 삼국은 수용과 토착화 과정에서 공통점과 독자성을 보이는 점을 들게 된다.

셋째, 우리나라 20세기 미술교육에 기여가 큼에도 불구하고 저간의 상황에서 가려진 바가 큰 장발 화백에 대해 20세기 우리나라 근대 화단에서의 역할에 대한 구명이다. 화가 자신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가 미진한 상황이나 화가의 그림 세계 즉 화경에 대한 총체적인 조명이 절실히 요구된다.

성심수녀회가 소장한 사진으로, 서울대목구 라리보 주교가 서품식을 주례하고 있다(1927년 이후). 왼쪽에 이번에 발견된 김대건 신부 초상화가 걸려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송란희 연구이사 제공

이원복 치릴로 도광포럼 대표·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