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특별기고] 폴란드 우크라이나 난민캠프에서 (하)

이수연 체칠리아 (AFI 국제가톨릭형제회 국제운영위원·인권플랫폼 파랑 이사)
입력일 2022-05-30 수정일 2022-05-31 발행일 2022-06-05 제 3297호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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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국적의 자원봉사자들
물품 전달·통역·이동 등 헌신 
전쟁 트라우마 겪는 피란민 돕고
현지 고려인 위한 연대와 협력도

고려인들이 우크라이나 리비우 역에서 구호품을 수령하고 있다. 이수연씨 제공

고려인들을 위해 리비우 역에서 운영되고 있는 구호 부스 모습. 이수연씨 제공

한 피란민 가족이 프셰미실역에서 키이우행 야간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수연씨 제공

‘슬라바 우크라이니’를 표기한 차량이 피란민들을 난민캠프로 이송하고 있다. 이수연씨 제공

‘슬라바 우크라이니!’ 난민캠프로 향하는 자동차에 붙여진 글귀입니다. ‘우크라이나에 영광을!’이란 뜻이라고 우크라이나 출신의 말가리다가 말해줍니다. 그녀는 난민촌에서 통역을 돕고 있지요. 프셰미실 카리타스에 등록된 90여 명의 봉사자들 중에는 말가리다처럼 피란민들이 여럿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봉사자들은 다양한 국적 출신으로 전직 경찰관부터 의사에 이르기까지 직업도 다양합니다. 길게는 두 달 이상, 짧게는 일주일의 휴가를 쪼개어 오는 분들도 있으며, 아예 직장을 그만두고 온 이들도 있습니다.

각자 알아서 난민들에게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 우리는 피란 보따리를 날라다 주는 일이 가장 기초적이며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통역이나 상담도 필요하고 봉사자들이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6개 언어를 구사하는 레오는 통역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우크라이나를 직접 방문하여 현장을 답사하고 영상을 만들어 배포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만 만나는 것으로 도저히 안심할 수 없다며 국경을 넘어 거기서 자국민들을 돕고 있는 피란민이자 봉사자인 이들을 인터뷰하고 온 것입니다.

레오처럼 국경을 넘어가는 이들도 있고 국경 근처까지 짐을 날라다 주거나 우크라이나로 가는 의료진들의 이동을 도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일시 귀국했다 연차 휴가를 다 쓰기로 작정했다며 자차로 현장에 다시 나타난 프랑스에 사는 패트릭은 자동차로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즐기며 도맡아 합니다. 패트릭의 아내도 잇따라 도착하여 부부가 함께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봉사자들이 저마다 재량껏 일할 수 있음은 최소한의 개입으로 자발적 활동을 보장해 주는 프셰미실교구 카리타스 실무자들의 열린 자세입니다. 사실 어디에서 누가 어떤 일을 얼마만큼 하고 있는지 아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이실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우리는 각자 알아서 난민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역할을 해야 하는 중에, 이곳에 오자마자 청년 민병대로 참여해 3개월 복무하고 나온 청년을 상담하게 되었던 것이 저에게는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청년은 공황장애와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고 위장 장애를 동반한 신체적인 상처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스무살의 이 청년에게 어른들이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과 햇볕을 쪼이며 몸을 이완하도록 배려하며 다른 피란민들을 돕는 일에 참여하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함께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차츰 안정되어 가는 걸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대학생이 받았던 것처럼 18세 이상의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지도하러 오는 노르웨이 출신의 군복차림 퇴역 장교들을 국경에서 만나기도 했습니다. 정식 훈련을 받지 못한 채 전장으로 파견되는 청년들이 나중에 어떤 외상을 입게 될지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황장애(Panic disorder)의 의미가 말해 주듯, 전쟁은 그 자체로 혼란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온갖 잡다한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 봉사자들은 ‘피란민에게 필요한 것을 한다’는 단 하나의 목표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먼저 온 사람은 다음에 온 사람들과 터놓고 협력을 해야 하지요. 즉석에서 팀이 형성되기도 하고 필요시엔 흩어져 각자 일을 분담합니다. 자신이 속한 단체의 범위를 넘어 서로 공조해야 단 하나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고려인들을 돕고자 동유럽의 여러 나라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만든 팀과도 협력을 했습니다. 슬라브 민족이 아닌 고려인이기에 우크라이나 난민 중에서도 더 소외되고 있음이 안타까워 교포들이 직접 돕고자 나선 것입니다. 다행히 우크라이나에서도 고려인들이 자체적으로 조직을 꾸려 공조하며 고려인들을 직접 돕고 있습니다. 특히 노인들과 아동들에게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현지와 진지하게 소통하며 물품 목록을 만들어 가장 유익한 것들을 구입해 보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인상 깊은 연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폴란드에서 직접 물품을 구입하여 우크라이나 현지로 보내고, 현지에서 고려인 가족들에게 구호품을 배달하는 형식으로 이어지는 이 활동을 위해 저도 팀원들과 물품을 직접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속한 AFI공동체와 음지에서 조용히 돕는 이범석 신부님으로부터 지원받은 기금으로 간편식과 아동용 비타민 그리고 응급조치에 필요한 약품들을 구입해 보낼 수 있었습니다. 소형 차량에 가득 실은 물품들이 피란조차 나오지 못한 고려인들에게 무사히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크라이나에는 2021년 기준으로 1만2000명 정도의 고려인들이 있다 합니다. 그중 약 5000명가량이 피란을 나오지 못하고 현지에 남아 있고, 한국으로 입국한 이들이 600여 명 된다 하는군요. 남부와 동부 전선 가까이에 거주하던 분들이 서쪽으로 대피해 집결해 있는데, 그분들에게 물품을 직접 전해줄 전달 체계가 마련되어 직접 물품이 배달됩니다. 다만 노출될 시 차후에 발생할 위험에 대비해 그분들의 사진은 철저히 외부에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일을 맡아 하는 고려인들이 현지에서 물품을 전달한 사진을 사회관계망을 통해 보내오면 그것으로 서로 확인을 할 뿐입니다.

어쩌면 프셰미실 기차역에서 만나고 있는 수많은 우크라이나 피란민 중에 고려인들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요. 최근 우리가 구입한 물품들이 각 가정에 배달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립니다. 구호물자와 함께 물건에 어떤 인사가 담겨야 할까요. ‘당신들을 누군가는 기억하고 있으니 희망을 갖자’는 말이면 족할까요? 전쟁이 가져온 혼란의 와중에도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하며 다시 되돌아가는 우크라이나인들의 고달픈 행렬을 바라보며 지난 3주간 했던 활동을 돌아봅니다. ‘정당한 전쟁’이란 없기에 어서 전쟁이 끝나기를 바라며 편지를 마칩니다.

이수연 체칠리아 (AFI 국제가톨릭형제회 국제운영위원·인권플랫폼 파랑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