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특별기고] 폴란드 우크라이나 난민캠프에서 (상)

이수연 체칠리아 AFI 국제가톨릭형제회 국제운영위원·인권플랫폼 파랑 이사
입력일 2022-05-24 수정일 2022-05-24 발행일 2022-05-29 제 3296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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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식량 가방 둘러멘 두 살배기… 전쟁은 모든 걸 앗아갔다
우크라이나-폴란드 국경 인근
피란민으로 북새통된 기차역
도움 절실한 노인·여성·아이들
정성을 모아 돕는 자원봉사 행렬
전쟁 종식과 평화 위해 기도를

폴란드 프셰미실 역사 앞에 설치된 급식소에서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배식을 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난민 출신 및 해외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이 피란민들에게 배식을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수많은 우크라니아 국민들이 난민 신세로 전락했다.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10㎞ 거리에 있는 폴란드 프셰미실. 이곳은 수많은 난민들이 몰리는 주요 관문 중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에서 활동 중인 국제가톨릭형제회(Association Fraternelle Internationale, AFI) 이수연(체칠리아) 국제운영위원의 글을 통해 우크라이나 난민과 그들을 돕는 봉사자들 모습을 전한다.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10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프셰미실 또는 프셰미시아라고 발음하는 폴란드의 작은 기차역은 매일 많은 난민들로 북적입니다. 피란민을 가득 태운 우크라이나의 키이우나 오데사에서 출발한 열차의 종착지이기도 하고, 다시 고향으로 가려는 난민들을 태운 기차의 출발지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늦은 밤기차에 탑승하려는 난민들이 동시에 이동할 땐 프셰미실 역사와 근처 플랫폼은 북새통을 이룹니다.

폴란드와 독일과 인근 국가로 임시 피란을 왔던 난민들 대부분은 노약자들이거나 아동, 그리고 유아를 동반한 여성들입니다. 지팡이나 보조기에 기대어 걷는 노인들의 표정엔 수심이 가득하고, 아기를 태운 캐리어를 끌고 다른 한 손으로는 보따리를 챙겨야 하는 젊은 여성들은 잔뜩 긴장한 채 난감해 합니다. 열차표를 산 난민들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방금 도착해 어디로 가야할지, 또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른 채 서성거리는 난민들에게는 대기하고 있던 봉사자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매일 독일 하노버로 가는 무료승차권은 어디서 받아야 하는지, 급식소는 어디이며 간식 창구에 마련된 물과 음식은 그냥 먹어도 되는지, 화장실은 어디고 난민촌 테스코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을 안내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각국에서 온 봉사자들이 주로 하는 일은 이삿짐에 준하는 무거운 보따리들을 날라 주는 것입니다. 승강기 없는 계단으로 아이들 서넛을 동반한 여성 피란민과 노약자들이 짐을 들고 이동할 땐 진짜 이게 피란이로구나 하는 걸 실감하게 됩니다.

피란 열차를 타고 오는 동안 지칠대로 지친 노약자들에게 물과 음식을 날라다 드리는 일도 봉사자들의 몫이고,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고 피란 짐 보따리에 채이지 않도록 무사히 이동하는 것을 도울 일도 봉사자들의 몫이지요.

엊그제는 초등학교 4학년 나이인 키릴을 만났습니다. 자기 몸집의 몇 곱절은 될 크기와 무게의 이민 가방을 끌고 등엔 큰 배낭을 맨 채 다른 한 손엔 작은 가방을 들고 호기심과 두려움이 교차되는 표정의 키릴은 지팡이 짚고 걷는 할머니와 어린 아기를 둔 누나와 함께 피란을 온 것입니다. 아빠는 징집되어 전선에 있고 엄마는 앞서 피란을 와 베를린에 있다고 했습니다.

어제 만난 네 명의 어린자녀들과 탈출한 파티마는 러시아 탱크 몇 천 대가 쳐들어와 마을을 초토화시켰다며 몇 천 대를 강조합니다. 삶의 터전을 파괴한 탱크의 위력과 폭력이 몇 천 대라는 말로 압축되는 것 같습니다. 아들이 치던 피아노도 딸들의 놀이기구도 모두 앗아간 탱크의 무력은 당장 멈추어야 할 악임을 파티마 가족의 미소에서 더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피란중임에도 밝게 뛰어 놀고 웃고 먹고 또 또래들끼리 어울리는 어린아이들은 역사 안을 밝히는 빛이지요.

한 카리타스 자원봉사자(오른쪽)가 난민들의 기차표를 확인해 플랫폼을 안내하고 있다.

한 자원봉사자(가운데)가 아이들과 함께 피란 온 난민 가족의 짐 운반을 돕고 있다.

우크라이나(왼쪽)와 중국(가운데) 청년 자원봉사자와 함께한 이수연씨.

두 살짜리 아이도 자기 먹을 식량가방을 메야 합니다. 누구나 어깨에 짐을 메고 두 손으로 가방을 끌고, 힘이 센 남자아이들은 어른들의 짐을 들어 계단을 오르내립니다. 난리가 났으나 담담한 표정으로 차분함을 잃지 않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이런 아이들이 일회용 스프를 먹으며, 강요된 고통을 묵묵히 이겨내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어른들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더구나 자신도 난민이면서 난민을 도우려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알렉산더와 같은 청년들은 얼마나 기특한지요. 왼쪽 눈의 시력을 잃어 징집될 수 없어 피신해 온 알렉산더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를 곧잘 하는 중국인 친구 후와 함께 매일 역에 와서 봉사를 합니다. 전적지였던 하르키우에 계신 할머니 걱정에 마음은 한시도 고향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합니다.

매일 급식소에서 배식하는 봉사자들의 상당수도 우크라이나 여성들입니다. 유명한 쉐프가 설립한 비영리 기구에서 운영하는 급식소는 기차역에 두 곳이 있고, 국경 난민촌과 거대한 쇼핑몰을 개조해 만든 난민촌에도 있는데 매일 양질의 식사를 제공합니다. 초기엔 텐트 급식소마다 하루에 수천 명의 식사를 챙겨야 했지만, 최근들어 프셰미실역 텐트 급식소를 찾는 난민의 수는 하루 1000명 남짓으로, 상당히 줄어 들었습니다.

이들이 봉사할 수 있는 것은 폴란드 가정에서 피란민들을 환대해 준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적이는 역사와 그 근처를 벗어나면 폴란드 남쪽의 이 작은 마을은 조용하고 차분하기까지 합니다. 주일엔 대성당에서 거행되는 매 미사마다 신자들로 가득하고 시민들은 난민들에게 무심한 듯 평상심으로 대하는 것 같습니다.

난민들을 맞아주는 것 외에도 전쟁 종식과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신자들의 염원은 15분마다 울리는 대성당의 종소리를 타고 마을 곳곳으로 울려 퍼집니다. 카리타스 봉사자들인 우리도 제각각 다른 나라에서 왔지만, 미사 중에도 울리는 대성당 종탑의 종소리가 저 멀리 우크라이나 최전선까지 전달되기를 간절히 빌어 봅니다. 우리의 단순한 이 봉사 활동의 끝은 전쟁 종식이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멀리 폴란드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소식을 드립니다.

이수연 체칠리아 AFI 국제가톨릭형제회 국제운영위원·인권플랫폼 파랑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