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8 그 후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상황을 수습하기 위한 활동이 시작됐다. 처음엔 전남도청에서 정시채 부지사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참석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회의에 참석했더니 신부들을 비롯해 각계각층 십여 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어떤 이는 ‘지금 젊은이들이 이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대체 여기서 뭣 하고 있느냐’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이 와중에 부지사는 내게 주석(主席), 위원장의 자리를 자꾸 권하기도 했다. 나는 그 자리를 한사코 사양하고 동석했던 조철현(비오) 신부에게 천주교 대표를 일임하고 어수선한 자리를 나왔다.
이후 계엄군의 소준열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강경진압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다가 파면된 윤흥정 장군의 후임으로 온 사람이었다. 소 장군은 수습위원들이 내세운 조건들에 대해서 나와 함께 얘기했는데, 그에게 전달한 나의 주장은 분명했다. ‘이 일을 수습하려면 군인들의 만행을 인정해야 한다. 그걸 전제하고서 상황을 봐야지 다른 방법은 없다. 군의 만행에 대해 사과하고 상황을 수습하는 조건이어야 한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방한, 광주 방문
나는 사제품을 받을 때 사목표어를 ‘그리스도의 평화’라고 정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서 새로 표어를 정할 수 있다고 해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런 평화에 대한 갈망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셨던 일이 있었다. 다름 아닌 ‘평화의 사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방한하신 것이다.
1984년 5월 4일, 그분의 방한 첫 공식 일정이 광주 방문이었다. 그해 5월만큼은 광주에도 슬픔과 아픔보다는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로마 교황청을 방문해 교황님을 뵙고 5·18에 대해서 짧게나마 얘기를 나눴었다. 그런데 교황님께서 그 비극이 벌어졌던 금남로에서 카퍼레이드 해주신 것이다. 신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도 금남로 양편을 가득 메웠다. 모두가 환호하고 박수를 치며 평화의 사도를 환영했다.
그때 교황님을 태운 ‘포프 모빌’에 동승했던 나에게 한 외국 추기경이 ‘아니 대한민국이 마치 가톨릭국가인 것처럼 보이네!’하며 감탄하는 말을 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모였으니 그런 기분 좋은 오해를 할 법도 했다. 이때가 내가 광주대교구장으로 봉직하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으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