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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 죽의 변신은 무죄다 / 최영균 시몬 신부

최영균 시몬 신부,제2대리구 호계동본당 주임
입력일 2022-04-13 수정일 2022-04-13 발행일 2022-04-17 제 3290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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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진자가 수십만 명씩 나오면서 내 주변을 돌아보아도 나만 빼고 다들 한 번씩은 걸린 것 같다. 나도 ‘이제는 언제 걸려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라고 생각하며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가끔 몸이 무겁고 컨디션이 안 좋으면 혹시 걸렸나 싶은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한다.

지난 3월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다. 그 날도 몸이 찌뿌둥한 것이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 미사 후 사람들에게 몸이 안 좋아 사제관에 먼저 들어간다고 이야기하고 쉬고 있었다. 저녁 무렵 어떤 신자가 걱정이 됐는지 사제관 입구에 A사 죽을 사다 놓았다.

아마 1인분 양이었을텐데 양이 많아 반만 먹고 반은 다음날 아침 먹을 생각으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이 되니 몸은 괜찮아졌고, 코로나19 자가진단키트도 한 줄 음성 표시만 나타나 안심하던 차에 수도회 소속 김 신부님이 찾아왔다.

“아침 식사했냐?”고 물었더니 “안 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남겨놓은 죽에 물을 더 붓고 끓였다. 1인분의 절반인데 한 명이 더 와서 2인분으로 만들려고 물을 더 붓고 끓이니 멀건 죽이 되었다. 죽 속에 내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생각 끝에 계란을 하나 풀어 넣었더니 훨씬 되어졌고 맛도 더 좋아졌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멀건 죽을 보면서, 예부터 사찰에서 먹었다는 ‘천장죽’이 생각났다. 불교 교리서 「운수일기」(雲水日記)에도 나오는데, 천장죽은 주로 일본 불교계에서 승려들이 먹는 음식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먹는 천장죽은 쌀을 거의 넣지 않고 끓여 먹는데, 쌀알을 찾으려고 밥통을 들여다보면 천장이 비친다고 하여 천장죽이다. 혹은 죽에 눈동자가 비친다고 하여 ‘눈동자 죽’이라고도 한다.

천장죽을 끓여 먹는 것은 불교의 수행에서 최소한의 생활에 감사하고 금욕적 생활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승려들뿐만 아니라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과도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죽은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물만 부으면 제한 없이 사람들의 배를 채워준다. 죽은 그 그릇을 잡은 사람만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 그릇 안에 비친 모든 사람의 것이 될 수 있다.

이렇듯 죽의 마음은 어질고 넉넉하다. 신약성경의 오병이어의 기적도 적은 양의 음식을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먹은 이야기로 4복음서 저자들이 모두 다루고 있다.

죽이나 빵과 같은 물질이 어떻게 나누어 먹는 마음을 갖게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예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물화(物化)된 결과가 그 빵이나 죽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반인분짜리 A사 죽이 2인분으로 변신해 맛이 없다 탓하기도 전에 슬며시 미소가 나온다.

최영균 시몬 신부,제2대리구 호계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