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미리내천주성삼성직수도회(상)

이재훈 기자
입력일 2022-03-22 수정일 2022-03-22 발행일 2022-03-27 제 3287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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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성심으로 천주성삼께 영광을

미리내천주성삼성직수도회 설립자 고(故) 정행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미리내천주성삼성직수도회 제공

미리내천주성삼성직수도회(총장 이관배 스테파노 신부)는 고(故) 정행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1991년 ‘성모성심을 통해 천주성삼께 영광’을 모토로 설립했다.

이에 수도회 회원들은 ‘항상 천주성삼의 현존을 인식하는 삶’을 목표로 삼는다. 수도회 회헌(3항)에 명시된 것처럼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는 삶이다.

1917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정행만 신부는 1929년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해 사제의 길을 준비한다. 정 신부는 1936년 예수성심 신심 전파자 마태오 크롤리 신부의 강론에 감화를 받았다. 이후 매일 묵주기도를 봉헌하며 성모신심을, 매주 목요일 성시간 기도를 봉헌하며 예수성심 신심을 길러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 신부는 1942년 사제품을 받을 때 자신을 천주성삼께 조건 없이 봉헌하는 특별한 신심도 보이게 된다. 이후 그는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는 등 사제로서의 완덕의 삶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정 신부는 1950년 2월 당시 대구대목구장 고(故) 최덕홍 주교의 허락 하에 경상북도 상주에서 수도회 설립을 준비했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 발발로 지연됐다. 이듬해 상주에서 지원자를 받고 설립 준비를 재개했으나 심장병을 앓게 돼 중단했다.

1962년 대구 동촌본당 주임으로 발령받은 정 신부는 대구 불로동 과수원에 터를 잡고 수도회 창립을 다시 준비했다. 그러나 2년 후 건강 악화로 상주에서 휴양을 해야 했다. 이 기간에도 지원자들이 와서 ‘정 신부 식구’라는 이름으로 공동체 생활을 했다. 이후 1976년 경기도 안성 미리내본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은 정 신부는, 당시 수원교구장 고(故) 김남수(안젤로) 주교 책임 아래 수사 지원자들과 함께 성당 사제관에서 지내며 수도회 창립을 준비했다.

1978년에는 첫 서원자를 배출하고 피정의 집 ‘대건 회관’을 증축해 수도원으로 봉헌했다. 이듬해에는 재정 자립을 위한 교회용품 제작 공방 ‘요셉 성물 공예사’를 열었다.

수도회는 1987년 수사 신부 2명을 비롯해 총 30명의 유기서원자를 배출하고 9월 교황청에 회헌 인준을 신청했다. 1990년에는 창립자 정 신부를 비롯한 총 19명의 회원들이 종신서원했다. 수도회는 1991년 1월 교황청으로부터 회헌과 설립 인가를 받았다. 2개월 뒤에는 김남수 주교가 ‘천주성삼 성직 수도회’라는 명칭으로 설립 인가교령을 반포했다.

이재훈 기자 steelheart@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