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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세이]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 / 윤길운

윤길운 사비나,제2대리구 안양비산동본당
입력일 2022-02-23 수정일 2022-02-23 발행일 2022-02-27 제 3283호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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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문 교리 영세자 이야기다. 폐암 말기 할아버지셨다. 교리교육을 하기로 하고 방문 요일과 시간을 정해 가족과 지역장에게 말씀드리고 시작했다. 이윽고 약속한 날 그 집을 방문하니 할아버지께서 거실에서 누운 채로 계셨다. 몸을 가누기 힘들어 하셔서 “편안하게 하세요” 말씀을 드리자,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으셨다.

교리를 시작하기 전에 “세례를 받고 싶으세요?”하고 여쭈니 고개를 끄덕이시며 “그렇다”고 대답해 주셨다. 그렇지만 너무 기력이 없으셔서 교리는 다음에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결정하고 집을 나서는데 따님이 “병원에서 연말까지 사신다고 해서 대세를 받으시라 했더니 정식 교리를 받아 세례받고 싶다고 하셔서 신청했다”고 사연을 들려줬다.

“아버지께서 몸은 힘드시지만 눈빛에 의지가 굳게 담겨 있어서 세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답해주고는 다음 방문을 기약했다.

다시 집을 찾았더니 할아버지는 웃는 모습으로 맞아주셨다. 그렇게 교리를 이어가던 어느 날, 한국교회사를 다루는데 새남터순교성지도 가보고 수리산성지도 여러 번 할머니와 함께 다녀와서 내용을 안다고 하셨다. 평소 교계 방송을 즐겨 봤는데, 성지 소개 프로그램을 보게 돼 그 계기로 다녀왔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할아버지께서 다산 정약용 선생을 참 좋아하셨고 정하상 성인까지도 잘 안다고 귀띔해 주었다.

교리를 마무리 한 후 주임 신부님께서 수녀님과 지역장, 구역장들과 함께 할아버지 댁을 방문해서 경건하게 세례식을 집전해 주셨다. 할아버지는 단정하게 분홍색 옷차림을 하시고 세례를 받으셨다.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손자가 꽃다발도 안겨드렸다. 그렇게 세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수녀님께서 영세자가 병색이 깊어 보이니 곧바로 병자성사를 드려야 할 것 같다고 신부님께 말씀드렸다.

며칠 뒤 할아버지는 병자성사를 받으셨다. 그때가 주님 부활 대축일 즈음이었다. 의사가 그해 이전 연말까지 살 수 있다고 예상했으나 할아버지께서는 몇 개월을 더 지내시면서 세례를 받고 부활절까지 맞이하셨다.

얼마 뒤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그 할아버지의 연도가 공지됐다. 가슴이 떨렸다. 세례를 받고 천진한 어린이처럼 좋아하던 그 할아버지, 몇 개월 더 사시는 동안 교리를 받고 세례를 받겠노라고 꼿꼿하게 밝히셨던 분.

‘그동안 하느님께서는 그 할아버지를 위해 삶을 연장해 주시고 사랑해 주셨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미사에서 가족들은 내 팔을 잡고 “아버님께서 세례를 받고 천국으로 가게 되어 정말 고맙다”며 눈물을 흘렸다. “저는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하고 말씀드렸다. 하느님의 자비 주일에 하느님께 올라가신 할아버지. “하느님 좋아요”라며 환하게 웃고 계신 것만 같았다.

윤길운 사비나,제2대리구 안양비산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