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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해·일치] '총창 위에 평화' / 강주석 신부

강주석 베드로 신부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입력일 2022-02-15 수정일 2022-02-15 발행일 2022-02-20 제 3282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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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래 ‘우리의 총창 우에 평화가 있다’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평화가 아무리 귀중해도 절대로 구걸은 하지 않으리. 우리의 총창 우에 평화가 있다.” ‘침략의 무리’에 용감하게 맞서 싸우겠다고 다짐하는 이 노래에는 강력한 국방력을 통해서만 ‘평화’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북한 정권의 논리가 잘 드러나 있다.

형제가 서로를 살해한 비극을 초래하면서 무력 통일을 시도했던 북한이지만, 북한 정권은 안보에 대한 불안을 강조해 왔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나라와의 전쟁을 아직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라도 ‘적’이 침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경제발전을 간절히 원하지만, 역설적으로 안보의 불안은 경제제재를 감수하면서도 핵무기 같은 군사력 증강을 지속하는 명분이 되고 있다. 게다가 북미 대화의 실패까지 경험하면서 북한 당국은 현재 자신의 체제를 보장받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핵무기와 미사일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에게 재앙이 되는 무기를 가지고 지키는 ‘평화’를 진정한 평화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두려움과 적대가 지속되는 상태는 평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한에서도 다수의 사람들은 안보를 위해서 군사력 강화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정권과의 대화나 협상이 어렵기에 무력을 통해서라도 ‘평화’를 쟁취하겠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남북관계에서 평화적인 방식을 추구하는 것은 북한에게 굴복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동서 냉전의 상황에서 핵전쟁 위기가 고조되던 1961년, 성 요한 23세 교황은 주님 성탄 대축일 담화문을 통해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권위로써 말합니다. 모든 폭력의 생각을 떨쳐야 합니다. 갈등과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자아내는 활동, 결정, 증오의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비극을 생각하십시오.”

신앙인이 추구하는 평화는 총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땅의 오래된 갈등을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결하기란 쉽지 않다. 평화는 가장 귀하고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에 어쩌면 쉽게 얻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든다. 평화를 위해서는 스스로를 낮추고, 자주 양보해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의 눈에는 ‘구걸’하는 자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평화를 위해서 십자가의 지혜와 용기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믿는다.

강주석 베드로 신부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