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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해·일치] 인류를 구한 남자 / 강주석 신부

강주석 베드로 신부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입력일 2022-01-25 수정일 2022-01-25 발행일 2022-01-30 제 3280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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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9월 26일, 구소련 방공군 소속 스타니슬라프 예브그라포비치 페트로프 중령이 모스크바 외곽의 군사기지에서 당직근무를 서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방공망 조기경보시스템 화면에 ‘Launch’(발사)라는 빨간색 글자가 커다랗게 나타났다. 미국이 발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소련을 향해 오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의미였다. 발사된 미사일이 처음에는 한 발이었으나 숫자가 늘기 시작했다. 미군이 발사한 미니트맨 미사일이 다섯 기라는 것이 최종 결론이었다.

페트로프의 보고가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미국에 반격할 핵미사일을 발사하는 권한은 모스크바의 수뇌부에 있었지만, 상황을 확인하고 신중한 결정을 내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존망이, 그리고 인류의 운명이 페트로프의 손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페트로프는 신중했다. 시끄럽게 울리는 경보 속에서 여러 정보를 종합한 끝에 그는 시스템이 오작동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훗날 이 결정에 대해서 페트로프는 “직감에 따른 결정이었다”면서 “확률은 50대 50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페트로프의 판단은 옳았다. 해당 경보는 위성이 구름에 반사된 햇빛을 적 미사일로 오인한 탓에 발령된 것이었다.

‘세상을 구한 남자’ 페트로프는 1998년 유리 보틴체프 전 소련 미사일방어사령관의 회고록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의 행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됐지만, 페트로프는 자신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사람들을 향해 “그것은 나의 일이었고, 나는 내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오히려 드러나지 않은 삶을 묵묵히 살았던 이 남자는 2017년 5월 19일 세상과 조용히 작별했다.

최근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들이 이어졌다. 군사적 긴장과 경제제재의 악순환이 수십 년째 지속되는 가운데, 대통령선거 후보에 의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까지 언급되는 현실은 이 땅의 ‘불안정한 평화’를 상기시킨다. 코로나19, 기후위기 등으로 전 인류의 생존이 크게 위협받고 있는데도, 남과 북, 그리고 주변 강대국들은 군비경쟁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군사력을 통해서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는 결코 무력의 균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성 요한 23세 교황님의 가르침이 더 절실한 순간이다.

강주석 베드로 신부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