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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20·끝) 최양업 기억되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11-16 수정일 2021-11-16 발행일 2021-11-21 제 3270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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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흘렸던 증거의 땀, 이 땅에 신앙의 꽃 피웠습니다
전국 돌며 헌신적인 사목활동 과로로 인해 안타까운 선종
흐트러짐 없이 본분 지키며 사제로서 영혼 구원 앞장서
교회, 2001년 시복 절차 착수
시복 위한 더 큰 관심 필요

가경자 최양업 신부는 배론 교우촌에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해 신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호흡했다.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는 원주교구 배론성지 전경.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사제로 살아온 12년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느님을 증거하고 교회에 헌신하며 신자들을 사랑한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 그가 태어난 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 시복을 위해 뜻을 모으고 있다. 증거자 최양업, 그 증거의 상속자인 우리는 그를 어떻게 기억해왔을까.

■ 교회, 최양업을 잃다

1861년 6월 15일. 조선교회는 큰 슬픔에 잠겼다. 최양업이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활동을 보고하러 가던 중 과로로 말미암아 장티푸스에 걸렸고, 보름만에 선종했기 때문이다.

최양업의 유해는 순교한 자리에 가매장됐다가 같은 해 11월 초 배론으로 옮겨졌다. 장례미사는 박해자들의 감시가 엄중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대목구 제4대 교구장 성 베르뇌 주교 주례로 여러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엄하게 거행됐다. 당시 교회 입장에서 김대건의 죽음도 크게 슬픈 일이었지만, 최양업의 죽음은 더 큰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던 것으로 보인다.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12년 동안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최양업이 고군분투하며 활동해온 모습을 곁에서 봐왔기 때문이다.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페롱 신부, 푸르티에 신부 등 동료 선교사들의 편지에서도 최양업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페롱 신부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몹시 애통해하며 편지를 드린다”며 “최양업의 죽음은 조선교회 전체의 초상”이라고 조선교회의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페롱 신부는 “제가 (조선에) 도착했을 때는 매스트르 신부가 돌아가셨는데, 올해는 더 귀중한 사람을 거두셨다”며 “우리가 어떻게 눈물에 젖지 않을 수 있느냐”고 전했다.

최양업이 떠난 빈자리는 조선교회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베르뇌 주교는 1862년 당시 부주교였던 다블뤼 주교의 보고서를 받고 “예비신자가 1000여 명이나 되고 복음이 그렇게도 빨리, 그리고 성공적으로 전파되던 저 훌륭한 도(道)인 경상도가 완전히 뒤엎어졌다”고 탄식했다. 최양업이 해온 활동은 그 자체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었고, 최양업이 행한 증거의 효과는 더없이 탁월했던 것이다.

베르뇌 주교는 최양업이 선종한 해 9월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최양업은 굳건한 신심과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불같은 열심,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라면서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 교회, 최양업을 잇다

최양업에 대한 기억은 전국 방방곡곡에 남아 있었다. 최양업이 그만큼 많은 곳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 복음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김대건은 사목기간도 짧았고 서울과 경기 일부 지방에서만 활동했다. 반면 최양업이 사목한 지역은 오늘날 남한 지역의 대부분이었다. 최양업은 조선 팔도 가운데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등 남부 5개 도에 흩어져 있는 127개 교우촌을 맡아 사목했다.

또한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등 최양업이 신자들에게 가르친 천주가사는 신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왔다. 천주가사가 구전으로만 전해지다 1880년대에 이르러서야 기록됐기에 최양업이 직접 저술한 작품을 가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천주가사를 기록한 신자들은 저자가 ‘최양업’이라고 밝히고 있다. 적어도 신자들이 천주가사를 전하고 또 전하며, 이 가르침을 전한 이가 ‘최양업’이라는 것을 기억해왔다는 점은 분명한 것이다.

최양업이 번역에 참여한 「천주성교공과」와 「성교요리문답」은 최양업의 사후 출판돼 각각 100여 년, 70여 년 동안 한국교회의 공식 기도서와 교리서로 수많은 신자들을 가르치는데 활용돼왔다.

전국 곳곳에서 신자들은 최양업을 기억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그리고 최양업을 기억하는 일은 그 자체로 그의 가르침, 정신, 영성, 신앙을 이어나가는 일, 바로 하느님을 따르는 일이 됐다. 최양업의 조카 최상종은 집안의 순교자들의 이력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최 신부 이력서」를 기록해 삶과 신앙을 알리기도 했다.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는 순교의 피에 부족하지 않은 증거의 땀을 흘린 목자의 삶을 사셨고, 이에 한국 교회의 모든 신자가 최양업 신부님의 영웅적 덕행을 본받고자 시복의 영광을 희망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지난 10월 14일 한국 주교단은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을 위한 기적 심사를 새롭게 추진하며’를 제목으로 발표한 담화에서 이와 같이 말했다.

시복을 위한 준비도 차근차근 진행했다. 1997년 청주교구가 시복 청원을 준비했고, 주교회의가 한국교회 시복시성 작업을 통합 추진하기로 하면서 2001년부터 본격적인 시복 절차에 들어갔다. 당시 한국교회는 이미 103위 순교자를 성인으로 기리고 있었지만, 시복 재판에 관한 경험이 적었다. 특히 최양업의 경우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로서 시복을 진행해야 하기에 시복을 위한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 노력으로 2016년 4월 26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최양업의 ‘영웅적 성덕’을 인정하는 시성성 교령을 승인하면서 최양업은 ‘가경자’로 불리게 됐다.

순교 자체로 기적 심사를 면제받고 시복될 수 있는 순교자와 달리, 증거자는 가경자가 되고 기적도 인정받아야 시복될 수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2021년 5월 교황청 시성성에서 최양업에 관한 기적 안건이 공식적인 기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결과를 받았다. 최양업의 시복을 위한 더 큰 관심이, 최양업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더 크게 필요해진 것이다.

최양업을 기억하는 일이 신자들이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 것처럼, 시복시성은 순교자나 증거자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신자들을 위한 일이다. 우리는 복자와 성인을 공경하고 현양함으로써 그들의 영성을 체득하고 우리 생활 안에서 복음적 삶을 증언하는데 힘을 얻는다. 최양업을 기억하는 일은 현재진행형이다.

■ 최양업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배론성지

원주교구 배론성지에는 최양업의 묘소가 있다. 배론은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신자들이 모여 형성된 교우촌이다. 배론 교우촌은 최양업 사목 당시 성직자 양성을 위해 성 요셉 신학교를 설립한 곳으로, 최양업은 사목 방문 중 이곳에서 신학생들과 어울려 생활하곤 했다. 이곳은 1801년 순교한 황사영(알렉시오)가 은신하면서 백서를 작성한 곳이기도 하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