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촛불과 태극기 할배들 서로 미워하지 맙시다 / 김형태

김형태(요한) 변호사
입력일 2021-11-16 수정일 2021-11-16 발행일 2021-11-21 제 3270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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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기도 전 깜깜 새벽에 카톡이 왔습니다. 전임 서울시장과 여당 대선후보가 빨갱이라는 아주 긴 글을 전혀 모르는 이가 보내왔더군요. 내 뜻과 상관없이 친구가 초대해서 끌려 들어간 대화방이었지요. 정치, 종교 얘기는 올리지 말라고 운영자 공지가 돼 있었는데 말입니다. 정치와 종교는 생각이 다 달라서 대화 자체가 힘드니 서로 차이를 존중해 주고 내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같이 지내는 데 필수죠.

‘차이’. 우리말로 ‘다름’.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길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빛이 생기기 전에는 어둠도 없었을 터. 그저 혼돈? 하느님? 우리들이 쓰는 언어로는 표현이 안 되겠지요. 아니, 표현은 둘째 치고 상상도 안 되는 것이지요. 있음과 없음을 넘어섬. 빅뱅(Big Bang) 이전.

그러다 빛이 생기니 어둠도 생겼습니다. ‘차이’, ‘다름’이 시작된 거죠. ‘하나’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차이’들이 생겨났으니 바로 이 세상은 ‘차이’들의 펼쳐짐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은 ‘차이’들이고, 그것들에 대한 인간의 개념, 언어, 생각, 마음도 이 ‘차이들의 비교’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에서 떨어져 나온 ‘차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다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 차이들을 넘어서 계신 ‘분’입니다. 하느님이라, ‘분’이라 부르고 나면 특정 대상으로 착각을 하게 되니 무어라 여쭐까. 차이를 넘어선다는 건 ‘사랑’이라는 뜻이어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사랑은, 차이의 펼쳐짐인 이 세상에서, 차이를 넘어서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하느님 자신입니다.

얼마 전 한 재일교포 간첩 재심사건을 변호했습니다. 제주도 출신인 그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가서 사업을 하며 돈도 제법 모았습니다. 해방돼 고향에 돌아오려는데 제주 4·3사건으로 수만 명이 억울하게 죽는 일이 벌어지자 그대로 오사카에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 주변 조선인들이 일상에서 받는 핍박과 어려움을 보고 열심히 도와주었지요. 조선 민족 주체성을 살리는 아이들 교육에 사재를 털어 가며 헌신했습니다. 민족교육에 있어서는 조총련이 확실했기에 자연스레 힘을 합쳤지요. 하지만 조총련이 조선인들 사이에서 신망을 얻게 되면서 차츰 조직 이기주의에 빠져 가는 걸 보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조총련을 탈퇴하고 한국에 와서 사업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의 국가안전기획부는 이분이 조총련을 탈퇴한 것도, 한국에 와 사업을 한 것도 다 북한의 지령에 의한 거라며 엄청난 고문을 하고, 결국 사형선고가 내려집니다. 뚜렷이 간첩행위로 볼 만한 게 없었기에 이번 재심에서 무죄가 됐습니다. 당시 비록 사형집행은 면했지만 수십 년 감옥살이 하다 나와서 세상을 떴고 일가친척들도 가족 간첩단으로 몰려 풍비박산이 난 뒤였습니다.

지난달 국가보안법 관련한 토론회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국가나 사회의 안녕질서를 해하는 사람은 내란죄, 외환죄, 간첩죄, 범죄단체조직죄 등으로 충분히 처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생각이나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을 아무런 위해가 되지 않는 경우에도 적과 동조한다면서 처벌하니 이는 정말로 ‘미움의 법’입니다. 그리고 미움을 조장하는 건 단순히 국가보안법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법이 폐지돼도 우리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서로 미워하는 한 또 다른 법이나 제도가 국가보안법을 대신할 것입니다. 실제로 요즈음 언론은 국가보안법 몇 곱절로 우리 사회에 증오를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새벽 내게 온 카톡도 나와 ‘다름’에 대한 미움, 그냥 그 자체였지요.

토론에서 사회자는 어떻게 하면 이 법을 폐지할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촛불과 태극기 할배들이 서로 미워하지 맙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다 하느님의 자녀라 하셨지요. 석가세존도 모두가 이 모습 그대로 부처라 하셨습니다. 성인이든 살인범이든, 부자든 거지든, 바보든 똑똑이든, 빨갱이든 파랭이든, 저마다 다른 이 모습 그대로.

왜냐구요? 이 모든 차이, 이 모든 다름은 바로 하나에서 나온 거고 결국 하나로 돌아가니까요.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형태(요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