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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화해·일치] 토지개혁 / 강주석 신부

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
입력일 2021-11-16 수정일 2021-11-16 발행일 2021-11-21 제 3270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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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서는 토지개혁이 단행됐다. 1946년 3월 5일,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이 발표되고 토지개혁은 신속하게 진행됐는데,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이 적용됐다. 일본 및 일본인 소유지, 민족반역자 소유지, 5정보(1만5000평) 이상 지주의 소작지, 경지 전부를 소작 주는 자의 소유지, 계속적으로 소작 주는 자의 소유지 등이 주요 몰수 대상이었으며, 여기에는 종교 단체의 소유지가 포함돼 있었다. 이렇게 몰수된 토지는 100만8000여 정보로 총 경지 182만 정보 중 55.4%에 해당하는 면적이었다. 북한만큼은 아니었지만, 남한에서도 토지개혁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다. 1948년 12월 4일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토지개혁문제’라는 제목으로 라디오 연설을 했다. 가장 큰 국민적 관심사인 농지개혁에 대한 이승만의 생각을 밝힌 것이었다.

교회 언론인 경향잡지는 토지개혁에 대한 소식을 자세히 다뤘다. 1946년 12월호, 1947년 2월호, 4월호, 6월호, 8월호를 통해서 연길지역과 함경도의 덕원자치수도원구 소식을 전하는데, 공산세력에 의해 가톨릭교회의 토지가 몰수되면서, 이 지역 교회들이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예를 들면, 덕원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존립이 어려워진 상황을 알리는데, “가톨릭과 악마의 전쟁이 벌어졌다”는 언급도 등장했다.

19세기 말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오랜 세월 박해를 피해 산골이나 외진 곳에 거주했던 신자들은 가난했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후원금까지 감소하자 교회는 경제적 안정을 위해서 농지를 매입했다. 교회의 운영과 효율적인 포교를 위해 토지를 활용하는 ‘교민주의’(敎民主義) 선교정책을 실행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토지의 몰수는 교회의 경제적 기반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토지개혁은 교회의 반공주의를 강화했지만, 최근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의 구술사(口述史) 작업에서 윤공희 대주교는 토지개혁에 대한 교회의 ‘다른 시각’을 언급했다. 덕원신학교 출신인 윤 대주교는 당시 신학교 학장 신부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교회 역사를 보면 수도원은 언제나 부자가 되기 마련이에요. 노동력 좋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수도원은 부유해집니다. 역사 안에서 볼 때 수도원 스스로가 재산을 포기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이렇게 ‘혁명’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 재산이 없어집니다. 하느님의 안배로 그렇게 되는 것이에요.”

부동산 가격 폭등에 이어 ‘대장동 사건’까지 불거지자 서민들은 큰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부동산 문제로 인한 불의와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 것을 보면, 무언가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느님의 안배’를 믿는 교회가 이 땅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먼저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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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석 신부(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