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43. 병자성사①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입력일 2021-11-09 수정일 2021-11-09 발행일 2021-11-14 제 3269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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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교리서」 1499~1513항
병은 하느님의 일이 드러나려고 존재하는 것
병은 벌이 아닌 은총의 통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결합시켜
하느님 백성의 선익에 기여하며 주님께 돌아오는 기회로 삼아야

닉 부이치치가 독일의 한 개신교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병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것을 좋게도 또 나쁘게도 만들 수 있다. 병은 하느님의 뜻에 따른 일이 드러나기 위한 신비로운 통로가 될 수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커먼즈

중병을 20년 가까이 앓으신 분이 상담을 신청하였습니다. 핵심 고민은 이것이었습니다.

“제가 죄인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많은 고통을 받을만한 죄는 짓지 않은 것 같은데, 하느님은 왜 제게 이런 큰 보속을 주시나요?”

보통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져서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처럼 여깁니다. 이런 생각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일단 병이 죄와 연관된다는 것은 맞습니다. 교회는 “병은 단지 세상의 죄의 결과일 뿐이다”(1505)라고 말하며 죄 때문에 병이 세상에 들어왔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 개인의 죄로 병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죄의 결과, 곧 원죄와 같은 원리로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병을 죄와 연관시키신 것은 맞습니다. 예수님은 중풍 병자의 병을 고쳐주시며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마르 2,5; 루카 5,20)라고 하십니다. 또한, 육체의 병을 고쳐주신 다음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라고도 하셨습니다. 당시에는 분명 “병이 신비하게 죄와 악과 관련되어”(1502)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병자성사는 고해성사와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질병은 회개의 길이 되고, 하느님의 용서는 치유의 시발이 됩니다.”(150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수난과 십자가 위의 죽음으로 고통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고, 속량을 위한 그분의 수난에 결합될 수 있습니다.”(1505)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앓는 이들을 고쳐주어라”(마태 10,8)라고 하셨고, 또 “내 이름으로 (중략)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마르 16,17-18)라고 하셨습니다. 병이 누구의 죄 때문이라는 단순한 논리를 넘어서서 교회를 통해 은총이 흐르게 하는 통로와 같은 의미가 된 것입니다.

‘닉 부이치치’는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었습니다. 아빠는 아기를 보고 구토를 했고 엄마도 처음 한 번 보고서는 더는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넉 달가량 아기를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모습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닉 부이치치는 어렸을 때부터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15살 때,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요한복음 9장을 읽는데, 거기에 태생 소경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2)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진흙으로 눈을 만들어주십니다. 그가 없었다면 예수님의 그러한 창조적 능력이 사람들 앞에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닉 부이치치에게 이 말씀은 삶을 바꿔놓는 은총으로 가슴 깊이 새겨졌습니다. 자신도 이유가 있어 그렇게 태어났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자신의 처지가 주님 도구가 되기 위한 준비로 보였습니다. 팔다리가 없는 자신과 같은 장애인이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해준다면 더 크게 감동할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현재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동기부여 강사이고 힘들고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원죄가 그런 것처럼 병도 주님의 일이 드러나기 위한 신비로운 통로가 되었습니다. 내 탓 없이 죄를 짊어지는 것이 원죄이고 그 덕분으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게 된 것처럼, 병도 주님의 권능이 교회를 통해 흐르게 하는 ‘복된 탓’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병을 죄에 대한 벌로 볼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자유로이 결합시켜 하느님 백성의 선익에 기여하도록”(1499) 하는 기회로 보아야 합니다. 물론 무엇보다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는”(1501)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해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1501)라고 한 야고보 사도의 권고대로 교회에 병자성사를 청하여 교회를 통해 주시려는 은총의 통로가 되게 해야 합니다.

병은 누구의 탓으로 생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뜻이 있으셔서 주신 것이고 그것에 대해 내가 어떠한 자세를 취하느냐가 그것을 좋게도 또 나쁘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