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세상의 빛] 142. 복음과 사회교리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 52)

이주형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
입력일 2021-11-02 수정일 2021-11-02 발행일 2021-11-07 제 3268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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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사회교리」 193항
“연대성, 타인을 착취하는 대신 이웃의 선익에 투신하는 것”
예언자적 소명 위한 정의 구현 적대감에 의한 분노와 구별돼야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토대로 공동선 향한 연대성 회복 절실

2019년 2월 미국 뉴욕의 한 노숙인이 거리에서 잠이 든 채 앉아있다. CNS 자료사진

베드로: 신부님, 사는 게 너무 어렵다 보니 화가 많이 납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조차도 오지 않아요.

바오로: 노력해도 세상은 바뀌는 게 없어요. 차라리 모두 망했으면 좋겠어요.

이 신부: 여러분들을 보니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 분노와 적대감

사회 현안의 정의와 공정을 이야기할 때 대립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경우도 있지요. 제도나 정치, 그 주체인 인간이 완벽하지 않기에 완벽한 제도나 정치는 존재하지 않음에도 언성을 높이고 설전을 벌입니다. 급기야 상대방을 증오하고 단죄합니다. 어떤 정책이나 후보자를 선호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증오가 사람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회정의를 선포하는 사제나 수도자, 신자들의 경우에도 지나치게 과도한 적대감과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판과 처벌을 강조하며 가시 돋친 비난과 언사들, “처벌하라, 구속하라, 엄벌하고 처단하라, 싹 다 망해야 해” 같은 말을 합니다. 자신이 받은 피해, 불의한 상황에 대한 분노, 약자에 대한 정의감 등은 인간적으로 이해합니다. 오죽했으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럴까, 한편으로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적개심과 분노, 미움과 원한을 쏟아내는 게 과연 적절한 해결책이 될까요? 그런 부정적 감정들이 일상화된다면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요?

■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세상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 이야기하는 세상은 여러 의미를 갖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질서 있고 선한 세상을 창조하셨지만(299항), 죄의 결과로 죽음과 타락이 발생합니다.(1008항)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고 아들을 보내셨지만(요한 3,16) 역설적으로 그 세상은 하느님을 거부합니다.(687항). 하느님께서 손수 지으시고 보시니 좋으셨음에도(창세 1,4) 세상에 악이 활동합니다.(409항) 악이 존재하고 인간이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은 자유 때문입니다.(311항)

물론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행과 부조리, 악한 일들은 종말의 날에 엄중한 심판을 맞이할 것이며 각자의 행업에 따라 갚게 될 것입니다.(682항) 예수님께서도 최후의 심판을 언급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엄격한 심판과 처벌에 대한 이야기는 비록 그것이 다소 부담스러우나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인 셈이지요. 오히려 종말과 심판을 믿지 못하고 미온적이고 흐리멍덩한 신앙생활을 하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 식별과 적극적 연대성

하지만 우리는 종말에 있을 심판과 적개심을 구분해야 합니다. 예언자적 소명을 위해 정의와 공정을 외치는 것과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쏟아냄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기에 감정으로부터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절제되지 못한 부정적 감정, 그중에서도 증오와 분노는 그 자체만으로도 죄종(죄의 뿌리)이며 또 다른 죄와 폭력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옛 계명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성을 내고 바보나 멍청이라고 하는 것까지 금하십니다.(마태 5,21-26)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탈출 34,6)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며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 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요한 3,17) 그래서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고 합니다.(야고 2,13) 「간추린 사회교리」에서 사회교리는 이 시대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봉사행위라고 표현됩니다. 또한 교회는 현세적 야심이나 목적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수행한다고 합니다.(13항) 그 핵심은 사랑과 자비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언급합니다. 바로 연대성입니다. 연대성은 단순히 함께한다는 뜻에 머물지 않습니다. 더 적극적인 의미로 이웃에게 빚을 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나아가 부정적 결과에 대해서도 함께 책임을 지는 것을 뜻합니다.(193항) 그래서 신앙인이라면 우리 시대의 아픔과 이웃의 눈물에 과연 나는 얼마나 함께하는지, 어떤 책임감을 갖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불우한 이웃을 외면했던 저 자신을 먼저 반성합니다.

“연대성은 정의의 영역 안에 자리하므로 근본적인 사회적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탁월하게 공동선을 지향하는 덕목이고 타인을 착취하는 대신에 이웃의 선익에 투신하고 복음의 뜻 그대로 남을 위하여 ‘자기를 잃는’ 각오로 임하는 것이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을 억압하는 대신에 ‘그를 섬기는’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193항)

이주형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