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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 역사이야기] (13) 프랑스 선교 보호권 문제

입력일 2021-09-28 수정일 2021-09-30 발행일 2021-10-03 제 3263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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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과 조약 맺고 천주교 금지 해제… ‘정치 개입’ 논란도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파견
중국 황실에서 영향력 발휘
1844년 10월 황포조약 체결
이후 천진·북경조약 맺으며 
선교 보호권 법적 승인 받아
불법 조항 등 외교 문제 비화

“프랑스의 전통적 보호 정책이 극동에서 성립됐다.”

프랑스와 중국(청나라)이 1860년 북경(北京)에서 조약을 체결하자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 모니퇴르’(Le Moniteur)가 1861년 1월 11일자에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이 말은 중국에서 프랑스의 천주교 선교 보호권이 국제법적으로 보장받았음을 의미하며, 나아가 프랑스가 중국에서 천주교 보호자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게 됐음을 뜻한다.

■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Padroado)

일찍이 동방 항로를 발견한 포르투갈은 알렉산델 6세 교황으로부터 동아시아에 대한 천주교 선교 보호권을 부여받았다.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은 선교사 선발권과 배치권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의 교회 설립권과 주교 후보자 제청권 및 십일조를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따라서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에 근거하면, 교황은 단지 포르투갈 국왕을 통해 간접적으로 동아시아 각국의 선교 사무를 관리할 뿐이었다.

그러나 점차 포르투갈의 국력이 약화됐고, 교황청에서 1622년 포교성(布敎省)을 설립해 아시아 선교지에 대목구(代牧區)를 설치하고 직접 포교성에 속한 주교를 파견해 관리하고자 했다. 따라서 동아시아의 선교 보호권을 둘러싸고 17세기 내내 교황청과 포르투갈 왕실 사이에 논란이 계속됐다.

17세기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정치적·경제적 교두보를 점차 잃어가고 있었던 포르투갈은 기껏해야 중국으로 오는 선교사를 마카오에서 제지함으로써 그들의 선교 보호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후 1838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인도와 중국에서의 포르투갈 선교 보호권을 취소했고, 1857년 교황청과 포르투갈은 마카오교구만 포르투갈이 보호하도록 하는 협약을 맺었다.

서십고 천주당의 모습. 서십고 천주당은 프랑스 루이 14세가 파견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요구로 강희제가 공부(工部)에 명령해 짓게 했다. 이 천주당이 잠지구(蠶池口) 천주당이다. 흔히 북당(北堂)으로 알려졌으며, 19세기 후반에 이주해 현재 서십고 천주당으로 불린다. 조선의 첫 영세자 이승훈이 이곳에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 프랑스 선교 보호권(Protectorat)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은 교황이 직접 부여한 권한인 반면, 프랑스의 선교 보호권은 이와 달리 근대 이후 중국과의 조약을 통해 획득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루이 14세 시기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의 중국 파견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당시 퐁타네(J. de Fontaney), 부베(J. Bouvet), 제르비용(J. F. Gerbillon) 등 파리과학아카데미 소속 예수회 선교사들이 1688년 2월 북경에 도착한 것이 프랑스의 중국 선교 보호권의 첫 전례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이 강희제로부터 허락받아 지은 성당이 바로 북당(北堂)이다. 이후 프랑스 예수회는 중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 있는 예수회 조직으로 성장했다. 1773년 예수회 해산 때까지 90여 명이 활약했는데,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와 비슷한 규모이지만 청나라 황실에서의 영향력은 훨씬 우세했다.

■ 120여 년 천주교 금지가 풀리다

아편전쟁 이후 1844년 10월 중국과 프랑스 사이에 황포(黃埔) 조약이 체결됐다. 일반적으로 황포조약 체결로 프랑스가 선교 자유를 획득한 것으로 오해하는데, 황포조약에는 ‘선교’와 ‘선교사’ 그리고 ‘선교 자유’라는 단어가 전혀 없다. 단지 조약 속의 교회 설립 허가, 프랑스인에 대한 안전 보장, 개항장에서의 문화 활동 허가 등의 내용이 간접적인 선교 자유와 관련돼 있다.

사실 프랑스 대표 라그르네(T. de Lagrené)는 조약의 교섭 기간 동안 조약체결과는 별개로 천주교 문제에 대한 교섭을 따로 진행해 중국 황제 스스로 천주교 금지를 해제하도록 이끌어 냈다. 결국 1846년 2월, 120여 년간 유지됐던 천주교 금지가 황제의 명령으로 풀렸다.

흥미로운 것은 라그르네의 통역관인 칼레리(J. M. Callery)가 마카오 조선신학교에서 김대건과 최양업 신학생의 교육을 맡았던 인물로 황포조약 체결 당시에는 프랑스 외무부 소속 통역관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칼레리는 당시에 파리 외방 전교회를 탈회해 사제 신분은 아니었지만, 중국과의 불평등조약 체결 때에 통역으로 일했던 일부 사람들이 선교사였던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선교사가 통역관을 맡았던 문제점이 1860년 북경조약의 체결 때에 명확히 나타난다.

중국과 프랑스가 체결한 1858년 천진조약 제13조. 중국과 프랑스가 체결한 1858년 천진조약 제13조에는 여권을 가지고 중국 각지에 들어가 선교하는 선교사들을 지방관이 보호해야 하며, 천주교 신앙을 가진 중국인에 대한 조사를 금하며 처벌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최병욱 강사 제공

중국과 프랑스가 체결한 1860년 북경조약 제6조. 중국과 프랑스가 체결한 1860년 북경조약 제6조의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에게 교부한다’(파란색 밑줄)는 말은 프랑스가 천주교 선교의 보호자라는 사실을 중국이 법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 선교사는 각 지역에서 자유로이 토지를 사거나 빌려서 건물을 세울 수 있다’(빨간색 밑줄)는 바로 프랑스 선교사 들라마르가 몰래 넣은 문구이다. 왼쪽 옆의 프랑스 조약본에는 없는 내용이다. 최병욱 강사 제공

■ 프랑스 선교 보호권 ‘성립’

라그르네의 요구로 이뤄진 천주교 금지 해제에 대한 황제의 명령은 중국 입장에서 보면 사실 프랑스 ‘오랑캐’들을 구슬리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황제의 명령은 국내법이기 때문에 프랑스 측에서도 무조건적으로 강요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천주교 금지 해제가 황제의 명령으로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박해는 여전히 중국 전역에서 행해졌다.

마침내 1856년 프랑스 선교사 샵들렌느(A. Chapdelaine)가 광서(廣西)성 서림(西林)에서 살해되는 사건으로 인해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제2차 아편전쟁에 참여했다. 제2차 아편전쟁의 결과인 1858년 천진(天津)조약과 1860년 북경(北京)조약 체결로 내지(內地, 중국내륙) 여행의 자유와 함께 천주교 신앙의 자유가 국제법적으로 인정됐다. 또한 과거에 몰수된 천주당 및 교회재산을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에게 교부’해야 하고, ‘프랑스 선교사는 각 지역에서 자유로이 토지를 사거나 빌려서 건물을 세울 수 있다’는 내용이 조약에 명시됐다. 특히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에게 교부한다’는 말은 프랑스가 천주교 선교의 보호자라는 사실을 중국이 법적으로 승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불평등조약 속에 있는 ‘신앙 자유’

그런데 프랑스와 중국이 체결한 북경조약에 불법적인 조항이 있다는 것이 나중에야 확인됐다. 그것은 바로 ‘프랑스 선교사는 각 지역에서 자유로이 토지를 사거나 빌려서 건물을 세울 수 있다’는 규정이었다. 이 내용은 프랑스어 조약본에는 없고 중국어 조약본에만 있는 조항이다. 어떻게 국가 간 조약 내용에 이러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인가?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 조약 체결에서 통역을 담당했던 프랑스 선교사 들라마르(L. Delamarre)가 임의로 중국어 조약본에 추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흔히 ‘내지(內地) 부동산 조매권(租買權)’으로 알려진 이 조항으로 인해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유로이 교회 건물을 세울 수 있게 됐으나, 이를 둘러싸고 중국 지역사회에서 많은 충돌이 일어났다.

그동안의 힘든 박해 속에서도 꿋꿋이 신앙을 지켜낸 중국 천주교는 이제 조약의 보호 아래 마음껏 신앙의 자유를 펼 수 있게 됐지만, 조약이라는 국제법적 보호의 명분 아래 정치적 요소가 개입돼 많은 문제점이 야기됐다. 참된 그리스도 신앙을 위해 묵묵히 선교에 임했던 많은 선교사들이 이제 반그리스도인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선교사와 교회에 대한 공격은 단순히 지역사회에서 종교적 분쟁이 아니라 서양 열강이 간섭하는 등 항상 외교적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최병욱(바오로) 강원대학교 인문학부 사학전공 강사

강원대학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부 전공은 중국 근현대 천주교사이다.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HK연구교수와 명지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회원이며, 강원대학교와 춘천교육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