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주말 편지] 새소리를 들었느냐 / 배채진

배채진(사도 요한) 수필가
입력일 2021-08-10 수정일 2021-08-11 발행일 2021-08-15 제 3257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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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지인인 독두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소호리 백운산의 깊숙한 곳에서 7000여 평 소나무를 하나하나 직접 손으로 만지며 가꾸는 은둔 거사다. 선생이 살고 있는 백운산이나 내가 사는 하동군 악양면 지리산 기슭이 주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서로 같지만, 거기는 택배 차가 안 들어가고 내가 머무는 여기는 들어온다는 점에서 다르다.

전화 내용은 이러했다. 아침에 밖으로 나오니 꾀꼬리 한 마리가 소나무 아래에서 죽어 있었다. 마침 꾀꼬리 장례용 석관으로 씀직한 직사각형 패인 돌이 있어 죽은 꾀꼬리를 거기에 안치하여 소나무 숲 좋은 자리에 묻고는 돌로 덮었다. 그러자 꾀꼬리 한 마리가 그 돌무덤에 내려 앉아 서너 번 울고는 날아갔다. 말하자면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조문 와서는 짝지 앞에서 슬피 곡을 했다는 것. 여기는 꾀꼬리가 둥지를 틀고 알을 부화시켜서는 새끼들의 비행 연습까지 시키는 장소이긴 하지만, 꾀꼬리가 이렇게 했다는 것은 꾀꼬리가 사람의 사정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는 거였다.

선생은 은퇴할 때 의사 면허를 미련 없이 반납하고는 산기슭으로 들어가, 거기서 내외가 함께 나무들 및 새들과 교감하며 살고 있다. 이전에도 그런 교감 이야기를 자주 들었는지라, 그리고 그분을 어느 영성가 못지않는 생태 영성가로 여기고 있는지라, 그가 전해주는 전화 내용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했다는 새도 새지만 그렇게 하는 새의 몸짓을 해석하는 선생의 생태적 안목이 내게는 더 감탄스러웠다.

「종교 박람회」에서 앤소니 드 멜로는 “새소리는 들었느냐”고 묻는다. “뭐라고? 새소리는 수백 번 들었고 나무는 수천 그루 보았다고? 그래, 네가 본 게 ‘나무 그것’이더냐? 아니면 나무라는 이름이더냐? 네가 나무를 보고 그 나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보게 될 때 너는 나무를 본 것이다. 새소리를 듣다가 말 없는 놀라움이 가슴 뿌듯 차오름을 느꼈을 때 그때 새소리를 들은 것이다.”

생태환경 문제에 공감하고 생태적 감수성으로 자연을 보는 눈이 내게 얼마나 있는지 선생의 전화를 받고 잠시 되돌아본다. 내가 머무는 곳 여기도 제철엔 꾀꼬리가 상주하다시피 하기에 그 울음소리를 매일 들으면서도 그 소리를 달리 들어보지 못했는지라, 선생의 생태적 안목에 당혹스럽기도 했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나는 새소리를 그냥 들은 것이고 그는 한 번을 들어도 ‘말 없는 놀라움이 가슴 뿌듯 차오름을 느끼면서’ 들은 거였다.

가톨릭신문에 의하면 교황님은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살리기 위한 7년 여정을 이끌어갈 ‘찬미 받으소서 7년 행동 플랫폼’을 발표하셨다. 행동 플랫폼에서 제시하는 7년 여정의 목표는 모두 7가지인데, 그중 ‘생태 영성’ 항은 “하느님의 창조 섭리를 되새기고 경이와 찬미, 기쁨과 감사로써 자연을 바라보라”고 권유한다. 이 권유가 오늘따라 내게 절실히 와 닿는다. 이 권유는 내게, 너 새소리는 제대로 듣고 있느냐고 묻는다. 나아가, 비록 소규모이긴 하지만 작물을 가꾸며 살고 있는 나에게, 환경보호 차원을 넘어서는 복음적 안목으로 자연을 이용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지, 가치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반면교사로 가르쳐 주었다. 생태 위기에 대한 성찰과 회개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절실한 때이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배채진(사도 요한)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