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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13) 김대건, 사목하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07-13 수정일 2021-07-14 발행일 2021-07-18 제 3254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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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에서도 뜨거운 사목 열정… 조선교회 찬란한 등불 되다
사제품 받고 곧바로 조선 입국
서울과 경기 일대 방문하며 신자들 만나 분주히 사목활동
옥에 갇힌 이에게 성사 베풀고 사랑 실천하며 새 희망 전파
교회 자립 위한 방안도 모색

2019년 5월 11일 대전교구 강경성당에서 ‘성 김대건 신부 사목 순례지’ 축복식이 거행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목자가 양 떼를 돌보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는 일을 우리는 사목이라고 말한다. 사목은 넓은 의미로 세상을 향한 교회의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성직자들이 신자들의 영혼을 돌보고 성사를 거행하는 것은 사목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어떻게 사목활동을 했을까.

■ 6개월의 사목, 어디서?

1845년 8월 17일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이 사제로 활동한 기간은 불과 13개월. 그마저도 많은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기에 체포되기 전까지 신자들을 만나며 사목한 것은 겨우 6개월 남짓이다.

김대건은 수품 즉시 중국 상하이를 떠나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에 입국, 서울과 경기 일대에서 사목했다. 김대건이 사목활동을 한 구체적인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여러 사료들과 증언을 통해 김대건이 어떤 장소들을 방문하며 사목활동을 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먼저 김대건은 1845년 10월 12일 입국 후 강경 구순오의 집에서 신자들을 만나 사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국정 운영 내용을 기록한 「일성록」에는 김대건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데 김대건은 “작년(1845년) 교우들을 만나보기 위해 이재용, 임성룡과 함께 구순오 집에 가서 머물렀다”고 진술했다.

서울에서는 복사 이의창(베난시오)의 도움을 받아 석정동(돌우물골)을 중심으로 사목을 펼쳤다. 「일성록」과 포도청 심문기록 등에 담긴 임성룡 등의 문초 내용을 살피면 김대건이 1845년 12월 이곳에서 여러 신자들을 위해 성사를 집전했음을 알 수 있다. 김대건에 관한 시복재판 중 증언한 이들의 말에 따르면, 남대문 밖 쪽우물골과 미나리골, 무쇠막 심사민의 집, 서빙고 등지에서도 성사를 주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대건은 경기도 안에서도 특히 용인지역을 중심으로 사목활동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시복재판 중에 오 바실리오는 1846년 봄에 은이마을에서 김대건을 봤다고 증언했고, 임 루시아는 양지의 터골에서 김대건에게 성사를 받았다고 전했다. 용인 지역, ‘은이마을 위쪽’에는 김대건의 어머니도 살고 있었는데, 김대건은 입국로 탐색을 위해 서울로 떠나기 전 1846년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이곳에서 봉헌했다. 또 김대건은 경기도 이천의 동산 밑, 단천 등지에도 사목방문을 했다고 한다.

탁희성 ‘교우들에게 성사를 주는 김대건 신부’.

■ 짧지만 깊은 활동

김대건을 만난 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대건이 얼마나 열성적으로 사목했는지 알 수 있다. 김대건의 시복재판에서 이 베드로는 김대건이 “교리를 설명하고 교우들을 가르치는데 기쁨과 열성을 다했고, 큰 열성으로 성사를 집전했다”고 증언한다. 또 박 글라라는 김대건이 “성사 집전에 엄격했다”고도 밝히고 있다.

김대건이 신자들을 만난 시간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김대건은 더없이 진지하고 열성을 다해 신자들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김대건의 열성적인 사목은 신자들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다. 그 감동이 얼마나 컸는지, 김대건의 순교 후 페레올 주교는 “그(김대건)는 대번에 신자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김대건의 순교 후 시복재판에 참석한 김 프란치스코도 “모든 교우들이 이 신부(김대건)를 많이 사랑했으며, 그들은 오로지 신부를 칭찬할 뿐이었다”고 전했다.

성 남경문(베드로)도 김대건의 사목활동으로 회개의 삶을 산 순교자다. 회장으로 활동하던 남경문은 기해박해 때 배교하고 풀려나 8년에 걸쳐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김대건에게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받으며 죄를 뉘우쳤다. 남경문은 방탕했던 과거를 속죄하기 위해 매일 새벽 오랫동안 기도를 하고 한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지내는 등 고행을 하다 김대건이 체포된 후 자신 역시 체포를 피하지 않고 마침내 순교했다.

김대건은 옥중에서도 그 특유의 열성적인 사목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김대건은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심문하는 상대에 이르기까지,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복음을 선포했다. 특별히 김대건은 함께 옥살이를 하고 있는 신자들을 돌봤다. 김대건은 1846년 6월 스승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함께 갇혀있는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로 용기를 북돋아 주고 예비신자 두 사람에게는 세례성사를 줬다”고 알렸다. 이런 김대건의 사목활동에 큰 감화를 받은 이 중 한 명이 성 임치백(요셉)이다. 임치백은 옥중에 있던 김대건의 가르침을 듣고, 옥중에서 김대건에게 세례를 받아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하기도 했다.

김대건의 열성적인 사목은 개개인의 신자들을 만나는 데만 있지 않았다. 김대건은 조선교회의 운영도 깊이 고민했고, 경제적 자립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김대건은 1844년 조선이 청나라와 물물 교역을 하기 위해 열던 경원개시를 관찰하면서 양국의 품목을 분석하고 조선에 가서 팔 수 있는 물건으로 “갖가지 색깔, 특히 흰색 서양 포목과 여러 가지 색깔의 명주, 여러 가지 색, 특히 붉은 색과 푸른색의 중국 포목과 이와 비슷한 것들”을 제안했다. 실제로 1845년 김대건 일행이 조선으로 입국할 때 구입한 서양 마포를 산 가격의 두 배 값으로 팔아 선교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김대건은 1845년 7월 페레올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며 조선에서 통용되는 은전의 모양을 그려 보내기도 했다.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국의 은괴를 녹여 조선의 은괴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 바 있다.

이렇듯 김대건이 사목에 열과 성을 다한 것은 바로 조선교회 신자들을 향한 사랑과, 그 신자들을 통해 본 희망 덕분이었다.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이 조선 입국에 성공한 1845년, 김대건은 한양에 머물면서 조선교회의 속사정을 자세히 살피고 스승인 리브와 신부에게 보고했다. 당시 조선은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가 순교하면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박해와 굶주림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자들은 사제들을 잃은 슬픔을 딛고 여전히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대건은 “신부님들이 순교한 후 오늘까지 (신자들이) 줄어들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증가해 최소한 만 명은 될 듯하다”며 적극적으로 신자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할 사목자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예전부터 우리 종교의 진리를 들어보고자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으니 지금 누가 용감히 나서서 그들에게 전교만 하면 종교를 수용할 사람이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 김대건 신부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대전교구 강경성당

대전교구 강경성당(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옥녀봉로27번길 13–3)은 김대건이 국내 입국해 사목하던 장소 중 하나다. 본당은 입국 당시 머물렀던 신자 구순오의 집이 있던 지역을 ‘성 김대건 신부 사목 순례지’로 조성했다. 본당이 조성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은 김대건이 사제품을 받은 중국 상하이 진자샹(金家巷)성당 외형을 본뜬 건물로, 강경과 김대건 신부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