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성가 소비녀회(중)

박민규 기자
입력일 2021-07-06 수정일 2021-07-06 발행일 2021-07-11 제 3253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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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낮고 절박한 곳으로 내려가다

필리핀 빠라나케(Paranaque-공동묘지 지역) 공동체로 파견된 성가소비녀회 수녀가 가정방문을 하고 있다.

성가 소비녀회는 강생의 길 위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43년 2명의 소비녀가 시작했던 공동생활은 차츰 회원이 늘어나면서 현 교리신학원 자리인 혜화동 36-1번지로 집을 옮기고 1945년에 본격 수련이 시작됐다. 1949년 수도회 회칙서가 교황청 인가를 받음으로써 정식 수도회로 자리를 잡았다. 작고 가난한 소비녀들의 삶을 축복하듯 입회자 수는 늘어나 1968년 정릉동 10번지에 본원 건물을 신축하고 지금까지 성가 소비녀의 모태가 되고 있다.

시대의 절박함과 인간의 고통을 읽고, 특별히 가장 가난하고 긴박한 사람들의 현장 속으로 뛰어내리시는 하느님의 강생을 이어가기 위해 성가 소비녀회는 그 목적을 분명히 한다.

남이 싫어하는 일, 하지 않는 일, 힘들고 궂은일을 찾아서 할 것을 독려한 설립자 성재덕 신부를 따라 사도직 우선순위의 명확한 기준을 세칙에 명시하기도 했다. 소비녀들의 사도직 우선순위는 언제나 가장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돌봄과 헌신이다.

소비녀들은 설립 당시부터 좁은 집에 무의무탁한 노인들, 버려진 아기들을 보살피며 함께 살았다. 1950년대에는 6·25전쟁 여파로 발생한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보육원과 전쟁미망인들의 자립과 여성 자활을 위한 기술학원, 양재소 등을 세우고 부상병을 간호했다. 피란으로 대구, 부산, 제주 등에 흩어져서도 각자가 있는 자리에서 고아와 부상병, 포로들을 보살폈다.

이후 교회의 요청에 따라 본당 사도직 파견이 점차 늘어났고, 수도회가 직접 경영, 관리하는 제도화된 사도직 신설도 가속화됐다. 기관과 시설을 운영하더라도 정신만큼은 초창기의 소비녀들이 지녔던 사도직 방식과 태도를 유지하고자 부단히 애를 썼다. 특히 가난한 가정 방문, 거리의 빈자들에 대한 돌봄과 전교 활동은 꾸준히 이어졌다. 또한 수도원 안에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사는 방식을 유지하고자 본원에 무의무탁한 노인들을 모시는 안나의 집을 설립했다.

1980년대부터 강생의 길은 해외로 나아갔다. 미국 필라델피아, 아르헨티나 한인 성당의 교포 사목에서 시작된 해외 사도직은 보다 더 절박한 곳, 더 가난한 곳으로 내려가 직접적인 선교 활동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선교지의 현실 한가운데서 함께 살아가며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또다시 더 절박한 곳을 찾아 내려가는 강생의 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990년대 초, 수도회 카리스마에 따른 사도직 식별로 대형 기관 사도직을 탈피하고 기존의 사업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서울성가병원의 성가복지병원으로의 전환과 소명여중고와 부천성가병원 무상양도가 이뤄졌다.

주님의 영이 다그치는 절박한 곳으로의 움직임은 서울의 대형 본당 사도직 식별과 철수로 이어졌다. 본당에서 무조건 철수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교구 내 신자 비율이 가장 낮고 이주민과 조손 가족이 많은 지역이라든지 물질적, 정신적 빈곤이 있는 곳에 수도자들을 우선 파견해 본당을 거점으로 신자 생활 돌봄과 지역민 돌봄을 병행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pmink@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