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교구 수도회 영성을 찾아서] 성가 소비녀회(상)

박민규 기자
입력일 2021-06-29 수정일 2021-06-29 발행일 2021-07-04 제 3252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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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강생의 신비 세상에서 실현

아이들과 함께한 성가 소비녀회 설립자 성재덕 신부(가운데).

예수 강생을 이 세상에서 실현하는 여종들이 있다. 성가 소비녀회의 시작은 하느님의 내려오심, 그분의 강생에서 비롯한다.

사람들 한가운데 천막을 치신 하느님, 그 삶을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는 하느님은 지금 이 시대에도 부서지고 상처 난 당신 백성의 고통과 아픔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고자 하신다. 그 하느님의 강생을 이 세상에서 계속하는 것이 성가 소비녀회의 존재 이유이다.

성가 소비녀회는 1943년 12월 25일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선교사 성재덕 신부(Singer Pierre)에 의해 설립됐다.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해 1935년 사제품을 받은 성 신부는 같은 해에 선교사로 한국 땅을 밟았다. 이어 1939년 서울 백동(현 혜화동)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 세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고, 한국도 일제강점 하에서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특히 성 신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할 수도회가 너무 적은 현실에도 체념하지 않았다. 그는 수도생활을 갈망하는 여성들을 불러 “여러분이 혼자 지내면 위험하기도 하고 어렵게 일을 해도 큰 결과를 거두기 어려우니 함께 뭉치면 많은 공로를 얻을 수 있고 완전한 수도생활까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고했다. 이 권고를 받아들인 두 명의 여성이 성재덕 신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혜화동성당 성모상 앞에서 순명을 약속했다. 1943년 12월 25일, 주님 강생의 밤이었다. 성가 소비녀회는 이렇게 설립됐다.

설립자는 성가 소비녀회를 세우면서 기존 수도회와 다른 ‘전문화된 수도회’라는 표현을 쓴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온갖 형태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할 수도회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본당 안에 머물면서 교우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 아닌 직접 전선에 나설 수 있는 일꾼, 가장 불행한 사태를 맞이한 사람들, 생사를 다투는 사람들,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죽을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이다.

초창기에 오늘날의 사도직 형태로 첫 공식 파견된 곳은 1947년 충남 합덕성당의 보육원과 수원 북수동성당이었다. 이때 성 신부는 소비녀들을 파견하면서 생활비는 스스로 벌도록 했다. 실제로 소비녀들은 본당의 가장 뒷자리를 지키면서 교회의 발길이 미처 닿지 못하는 먼 길을 걸어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불편한 상황일 수밖에 없는 그곳에서의 사도직은 2개월 만에 철수했다.

그 후에 정식으로 서울의 몇몇 본당에 전교 수녀로 소비녀들이 파견됐다. 이들의 정신은 분명했다. 본당 사도직은 2차적인 것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하도록 하고 본당에서 생활비를 받지 않도록 했다. 때문에 본당 사도직 수녀들은 생활비를 벌기 위한 노동을 함께 해야만 했다. 그 정신은 지금까지 성가 소비녀회 회원들 안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성가 소비녀는 설립자 성 신부처럼 벼랑 끝에 서서 생각하고 살아가는 여종이다. 이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는 하느님의 마음과 맞닿아 있는 강생의 소명이다.

박민규 기자 pmink@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