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앙인의 눈] 서로 얼굴만 보아도 흥겨운 못난이가 됩시다 / 김형태

김형태(요한) 변호사
입력일 2021-05-25 수정일 2021-05-25 발행일 2021-05-30 제 3247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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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신경림 시인의 ‘파장’이란 시 첫 대목을 읽으면 절로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정말 옛날에는 못난 놈들이 참 많았습니다. 아니, 너나 나나 다 못난 놈들이었지요.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木櫨)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이었습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그 많던 못난이들은 다 사라지고 모두가 똑똑이가 됐습니다.

요즈음은 신문도 TV도 보기가 꺼려집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청와대 신문고에 누구를 엄벌하라는 청원이 달리고, 언론들은 어떻게든 흠을 잡아 기삿거리를 만들어 내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백신 때문에 죽었다는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아주 드문데도 그저 백신 맞은 뒤 죽은 사람들 숫자를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이 열심히 보도해 댑니다. 백신 맞지 말라고 겁을 주는 셈인데 백신의 이익이 해보다 훨씬 크다고 아무리 말해도 언론들은 막무가내입니다.

정치인들은 정치인들대로 정치로 풀어야 할 일을 가지고 무조건 법으로 끌고 가서 검찰 수사를 자초합니다. 검사들은 정말이지 저승사자보다 더 무섭습니다. 손 안 대는 데가 없습니다. 핵발전소를 유지하느냐 그만두느냐는 사회적 합의에 의해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것인데 여기에도 수사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모두가 세상일을 순리로 보지 않고 비틀어 보려 합니다.

돌아보면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나랏일을 자기와 친한 아줌마에게 맡기고 공과 사를 구분하지 않은 것이 밝혀졌을 때 다들 너무 놀랐었지요. 생때같은 아이들 수백 명이 탄 배가 맹골수도, 어감도 무서운 바다 한가운데서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는 걸 몇 시간째 TV로 뻔히 지켜보면서도 구해 주지 못한 무력감. 그때부터 시작된 과거 잘못을 바로잡는 검찰 수사와 헌법재판소 탄핵 과정에서 언론들은 신이 났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열광했더랬지요.

그런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를 잡고 나면 필요 없어진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뜻입니다. 필요할 때 써먹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야박함을 빗댄 말이지만 이렇게 뒤집어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사냥개가 한번 짐승을 잡고 나면 주인에게도 달려드니 사냥이 끝나면 삶아 먹어라. 과거를 바로잡겠다고 나선 언론이며 검찰이며 아니 우리 모두가 이제 사냥개의 본능에 사로잡혔지 싶습니다.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으려 시작된 ‘비판’이 이제는 막무가내식 ‘헐뜯음’의 단계로 넘어간 거지요.

세상 모든 일에는 반드시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동시에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이걸 노자는 ‘화혜복지소의 복혜화지소복’(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이라, 화는 복의 옆에 기대 있고 복은 화에 엎드려 있다고 했습니다. 과거청산을 위한 비판이 긍정적인 소임을 하는 과정에서 이제 헐뜯음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이 부정적인 측면 또한 바로 그 속성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새로운 긍정의 단계로 나아가겠지만 말입니다.

이제 서로를 헐뜯고 고소하고 청와대 청원하는 일은 그만둘 때입니다. 엊그제 가톨릭평화방송 TV를 보고 있는데 어느 신부님이 그러시더군요. 예수님 가르침의 요체는 ‘나눔’이니, 성체성사도 나눔이요, 하느님 나라 건설도 나눔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그 옆 채널 개신교 방송들에서는 목사님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 설교를 하고 있더군요. ‘나’의 구원. 그저 ‘나, 나, 나’.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데 정작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이들과의 ‘나눔’이었지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 하느님의 자녀요 저마다 하느님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고 하셨으니 한 몸 한 형제로서 서로 함께 나눔은 당연한 거지요. 불교에서도 우리는 부처의 성품을 지니고 있으니 그걸 알면 다 부처라 했습니다. 그리고 혜능 스님은 부처를 이렇게 풀었습니다. “부처의 행동을 하는 이가 부처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모상이요, 부처의 성품을 지녔으니 이제 서로 헐뜯기는 그만하고, 다 함께 나눌 일입니다.

이제 ‘나 잘난’ 똑똑이는 그만두고 서로 얼굴만 보아도 흥겨운 못난이가 될 일입니다.

■ 외부 필진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김형태(요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