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⑪ 연옥(煉獄)의 정의(定義)

김산춘 신부 (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
입력일 2021-05-25 수정일 2021-05-25 발행일 2021-05-30 제 3247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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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한 죄인의 여죄 씻는 천국과 지옥의 중간
‘칠층산’을 기어오르는 연옥 죄의 허물 벗는 참회의 장소
산 자들 기도·선행으로 가속
늘 열려있는 지옥문과 달리 바늘구멍처럼 좁은 연옥문

구투조, ‘연옥의 해안’(1970).

시인 단테의 「신곡」은 먼바다를 향해 출범하는 항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미지의 세계로 떠났던 오디세우스처럼, 시인 단테 또한 육신의 고향인 과거의 피렌체로 귀환하지 않고 영혼의 고향인 미래의 천국을 향해 떠난다.

보다 편한 물 위를 달리기 위하여

내 재능의 쪽배는 돛을 활짝 펼쳤으니

그토록 참혹한 바다를 뒤에 남긴 채(연옥 1, 1-3)

한편 주인공 단테는 지옥 편에서는 마치 동굴 탐험가처럼 더듬더듬 지하로 내려가고, 연옥 편에서는 마치 등반가처럼 엉금엉금 칠층산을 기어오른다. 그리고 천국 편에서는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처럼 훨훨 태양계를 날아오른다.

발타자르는 신학적 미학을 다룬 「영광」에서 「신곡」을 연옥 편, 천국 편, 지옥 편 순으로 해설한다. 왜 지옥 편이 맨 앞이 아니고 맨 뒤에 가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무엇보다도 구원하는 사랑이다. 하지만 영원히 단죄받은 나라, 영원히 배제된 나라인 지옥에서도 복음은 구원하는 사랑일까? 지옥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베르나노스는 「시골 사제의 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가운데 하나가, 산 자 가운데 가장 타락하고 가장 경멸스러운 자가 그러한 불타는 심연 가운데로 던져진다면, 나는 그의 고통을 나눌 준비가 되어있는가? 나는 집행인에게 그를 요구해야 하는가? 그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 지금은 까맣게 탄 돌의 형언할 수 없는 상실은, 한때는 인간이었던 그들이 더 이상 나눌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슬픔이다.”

우리는 이미 지옥 편 후반부에서 인간에서 짐승으로, 짐승에서 돌로, 돌에서 얼음으로 변한 죄인들을 보았다. 단테는 더 이상 동정을 베풀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지옥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정의에 의해 완전히 가려진다. 오직 응보(應報, contrappasso),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lex talionis)만이 작동한다. 그런데 어떻게 베르길리우스는 지옥에서부터 나와 연옥까지 단테를 안내할 수 있었을까? 또 어떻게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적이 없는 황제 트라야누스와 트로이의 영웅 리페우스는 천국에 와 있을까?(천국20) 모든 것은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 하느님의 섭리에 달려있다.

「신곡」 전체는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연옥에서의 재회를 둘러싸고 구성된다. 특히 칠층산은 그 만남을 위한 준비이다. 칠층산은 참회, 고백, 보속이 하나로 된 산이다. 그 산을 한 층씩 올라가는 것은 죄의 허물을 벗는 것이며(2,122), 매듭을 푸는 것이다(23,15). 등반은 낮에만 가능하며(7,44), 올라갈수록 쉬워진다(4,90). 그 오름은 산 자들의 기도와 선행으로 가속되며(6,37-39), 은총으로 도약한다(9,1-69).

이제 나는 인간의 영혼이 깨끗이

씻겨 하늘로 오르기에 합당하게

되는 저 둘째 왕국을 노래하련다.

(연옥 1, 4-6)

이것이 바로 연옥의 정의다. 연옥은 12세기 이후에 나온 개념이다. 서양 중세는 혈통의 고귀함을 강조하는 귀족 계급과 하층민인 농민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도시 시민 계급의 등장으로 봉건제의 농업 경제에서 도시의 상업 경제로 바뀌어 갔다. 이제 고귀함은 혈통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다. 따라서 속죄의 장소인 연옥이 필요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연옥 편 제5곡에 나오는 부온콘테 다 몬테펠트로는 평생 죄를 짓다가 죽기 직전에 흘린 참회의 눈물 한 방울 덕분에 하늘로 올려졌다. 죄를 씻는 과정도 없이 순교자들과 성인들과 함께 있게 된 것이다. 참회한 죄인들도 어디선가 여죄(餘罪)를 씻어야만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신학자들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영역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그곳을 연옥(煉獄), 곧 정죄계(淨罪界, purgatorio)라고 불렀다. 이렇듯 연옥의 논리적인 필연성은 인정되었지만, 당시 시각적 문학적 신학적 선구자들은 아주 빈약하였다. 이제 단테의 연옥 편은 가장 독창적인 창조물이 된다.

지옥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어 어디서든 쉽게 들어갈 수 있다. 반면 연옥은 침투하기 어려운 요새와도 같다. 연옥은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질 때 생긴 원추(圓錐)형 산이다. 그 산은 가파르다. 그리고 두 벽으로 보호를 받는다. 하나는 벼랑으로 연옥 입구와 본 연옥을 나눈다. 다른 하나는 불의 벽으로 연옥과 지상 낙원을 분리한다. 벽들 사이에는 일곱 개의 동심원적 둘레길이 있다. 각 둘레길에서 영혼들은 칠죄종(七罪宗 : 교만, 질투, 분노, 게으름, 탐욕, 식탐, 음란)의 죄를 씻는다. 연옥의 문은 바늘구멍처럼 좁고(마태 7,13-14), 이중으로 잠겨있으며 항상 천사가 지키고 있다.

김산춘 신부 (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