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산재 사망 노동자 故 정순규씨 아들 정석채씨

박민규 기자
입력일 2021-05-17 수정일 2021-05-18 발행일 2021-05-23 제 3246호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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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기업 상대로 홀로 진상규명 버거워… 의지할 곳 교회뿐”
고인, 공사 현장 일하다 안전망 없는 데서 추락사
건설사 “본인 부주의”라며 문서까지 위조하다 들통
“진정한 사과와 대책 필요”

정석채씨가 고인이 현장 안전관리 감독자라는 사측의 서류가 필적감정 결과 위조로 드러났다는 필적감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인터뷰는 방역 수칙을 준수하며 진행됐고, 인터뷰 사진 촬영 시에만 마스크를 벗었다.

“의지할 곳은 이제 교회밖에 없습니다.”

산재 사망 노동자 고(故) 정순규(미카엘)씨 아들 정석채(비오·서울 성산동본당)씨는 아버지의 죽음이 왜곡되고 있는 현실을 접하며 교회의 도움을 호소했다.

고인은 2019년 10월 부산 경동건설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옹벽을 설치하는 일을 하다 비계(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설치된 임시가설물)에서 떨어져 숨졌다. 사고 직후 촬영한 사진을 보면 옹벽과 비계의 거리가 45㎝가량 떨어져 있었다. 법의학자와 안전 전문가들은 4m 높이에서 그라인더 철심 제거 작업 중 비계 안쪽으로 추락했을 확률이 높다고 추정하며 사측이 8가지 안전규정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사고 3일 후 유가족이 다시 현장을 방문했을 땐 안전망이 설치돼 있고 비계도 옹벽 안쪽으로 붙여 사람이 떨어질 틈이 없게 돼 있었다. 부품도 새것으로 교체돼 있었고 사다리 모양도 바뀌었다.

경동건설 측은 비계에서 추락한 것이 아니라 고인의 부주의로 수직 사다리를 타다가 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5월 12일 열린 부산지방법원 동부지원 형사4단독 결심공판에서 경동건설 측 변호인단은 “안전한 계단식 통로로 갈 것인지, 위험하지만 보다 빠르게 사다리를 이용할 것인지는 망인의 선택”이었다며 고인 책임이 크다는 취지로 변론했다. 정씨는 “현재 목격자도 없고 CCTV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경동건설은 현장을 바꾼 뒤 아버지 부주의로 사다리에서 추락했다는 것을 사실로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난해 재판 과정에서 고인이 현장의 안전관리 감독자라고 주장하며 피고인 측이 제출했던 ‘관리감독자 지정서’도 유족이 필적감정을 맡긴 결과 이름과 친필서명 모두 위조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날 검찰은 경동건설 현장소장과 하청업체인 JM건설 이사에게 고작 징역 1년6개월을 구형하고, 경동건설 안전관리자에게는 금고 1년을, 원하청 법인에게는 각각 벌금 1000만 원을 구형했다. 정씨는 “재판 결과는 참담함 그 자체였다”며 “개인의 힘으로 부산에서 가장 큰 건설사를 상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버거운 일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고 밝혔다.

사고 발생 이후 정씨는 아버지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생업도 포기한 채 1년6개월간 매달리고 있다.

“저와 같은 상황에 처한 유족들은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직접 증거를 찾고 알리지 않으면 또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묻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고 싶을 뿐”이라며 “사측의 진정한 사과를 통해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져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길 바란다”고 밝혔다.

평소 성가대 활동도 열심히 하며 깊은 신앙 안에서 살아온 정씨는 “본당 교우들이 탄원서를 작성해 주고 진심 어린 기도로 함께해 줬다”며 “외로운 싸움에서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바로 교우들의 기도”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대책위도 없이 홀로 싸우는 상황에서 교회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며 “더 이상 아버지와 같은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연대하고 힘이 돼 주길 간곡히 부탁한다”고 호소했다.

박민규 기자 pmink@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