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 교구 지정 순례지 탐방] (5)남한산성성지

이재훈 기자
입력일 2021-05-17 수정일 2021-05-20 발행일 2021-05-23 제 3246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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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수많은 평신도들의 순교터
이름·행적 알려진 36위 외에 70년간 300여 명 순교한 곳
순교 상황 묵상하며 걷도록 포도청·감옥·시구문 등 포함 도보 순례길 코스도 조성

남한산성성지 성당. 2015년 4월 25일 노후화한 기존 성당을 대신할 지상 2층 한옥형태의 새 성전을 봉헌했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로 763-58 소재 남한산성성지(전담 김유곤 신부, 이하 성지)는 1626년 광주 유수(留守)의 치소(治所), 포도청 및 마을이 성안으로 이전되면서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은 곳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처형됐기 때문이다. 성지에선 신유박해 때 복자 한덕운 토마스(1752~1802)를 시작으로 기해박해를 거쳐 병인박해 후기까지 70년간 약 300명의 신자들이 순교했다. 그중 이름과 행적이 남아있는 순교자는 총 36위다.

성지는 수많은 순교자의 신앙 순교터이자 ‘죽은 이들을 위한 안식처’라는 특별함도 지닌다. 이는 첫 순교자 한덕운 복자가 보여준 영성과 삶에서 비롯된다. 한덕운 복자는 홍주 출생으로 복자 윤지충으로부터 십계명을 배운 뒤 입교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느님 뜻에 따라 수행하고 신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신유박해 때는 교회 동정을 살피고자 옹기장수로 변장해 서울 청파동, 서소문 일대를 다녔다.

한덕운 복자는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홍낙민 루카와 최필제 베드로 등 순교자들의 시신을 돌보고 장례를 치르는 모범을 보였다. 한국교회 연령회 활동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로 인해 신자임이 들통나 1801년 한양에서 체포됐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에 관한 기록을 모은 「벽위편」에 따르면, 한덕운 복자는 1802년 1월 30일 남한산성 동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성지가 있는 남한산성은 뼈아픈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인조는 1637년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에 맞서 피신해 항전하던 중 왕자들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패색이 짙어지자 전쟁 발발 45일 만에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 나가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민족의 비극이 서린 곳이다.

하지만 200여 년이 흐른 뒤 천주교 신자들은 달랐다. 신자들은 70여 년간 굴욕의 아픔이 서린 현장에서 참수, 교수, 장살 등 다양한 방법으로 순교의 영광을 택했다. 현실에 타협해 얻은 삶보다 죽음으로 하느님을 향한 마음을 지켰다. 현실을 넘어 진정한 승리와 생명의 문을 열어 보인 것이다.

교구는 순교자들이 남한산성에서 보여준 영성을 계승하고자 1978년 성지 터를 마련하고 1995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나섰다. 1998년 9월 30일에는 성지로 공식 선포했다. 이후 2015년 4월 25일에는 노후화한 기존 성당을 대신할 지상 2층 한옥형태의 새 성전을 봉헌했다. 기존 성당은 한덕운 복자를 기념하는 ‘토마스 홀’로 만들었다. 또한 교회 책방을 마련해 신자들의 편의를 돕고 있다.

남한산성성지 성당 내부. 제대 십자가상 옆에는 주위로 광채가 퍼지듯 보이게 해 예수 그리스도가 쓴 가시관을 이루는 작은 가시를 표현했다.

5월 14일 성지를 찾은 신자들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남한산성에서 스러졌던 순교자들처럼 칼을 받아쓴 제대 십자가가 눈에 들어온다. 주위로 환한 광채가 퍼지듯 보이게 해, 예수 그리스도가 쓴 가시관을 이루는 작은 가시를 표현했다. 성당 왼편 계단을 올라가면 야외 십자가의 길 14처와 야외 미사 터를 만날 수 있다.

성지는 순교자들이 순교 당시 겪었을 상황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보로 30분 정도 걸리는 순례길을 조성했다. 성지 정문을 마주하고 서있는 순교자현양비에서 출발해 순교자들이 갇혀있던 포도청과 감옥, 심문을 당하던 연무관과 제승헌, 순교자들의 시신이 성 밖으로 버려졌던 시구문, 처형터로 이용됐던 동문 밖 형장을 돌아오는 코스다. 이중 시구문 밖 계곡은 순교자들의 무덤과 같은 곳이라 순례자들이 반드시 들러 순교 정신을 묵상할 수 있도록 권장되는 장소다.

성지는 화요일부터 주일까지 오전 11시 미사를 봉헌한다. 매주 화요일 미사 뒤에는 연도를 바치며 목요일 오후 2시에는 성시간을 거행한다. 금요일 미사 뒤에는 십자가의 길 기도가 봉헌되며, 매월 첫 금요일 오후 8시에는 떼제기도회도 진행한다. 현재 교구 코로나19 방역조치에 따라 성시간과 떼제기도회는 중단됐다.

남한산성성지 순교자현양비.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신자 300여 명을 기리고 있다.

남한산성성지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의 연관성은 교구에서 지정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200주년 희년’ 전대사 수여 순례지 중 한 곳이라는 것 외에는 사실 없다. 하지만 남한산성성지가 코로나19 상황 속 성 김대건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아 평신도에게 주는 의미는 더 각별하다. 대부분이 이름을 알 수 없는 평신도였던 성지 내 순교자들의 입장을 신자로서 더 공감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친구와 함께 남한산성성지를 찾았다는 김정숙(데레사·제2대리구 과천본당)씨도 “성지에 있는 순교터와 여러 장소들을 보며 이곳이 평신도와 밀접하다는 점을 더 절실히 느낀다”며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성지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담 김유곤 신부는 “남한산성성지는 과거 이천·하남·양평에 있던 많은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넋을 간직한 곳”이라며 “성지를 방문하는 분들이 신앙을 증거하고자 순교한 이들이 당시 가졌던 희생정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문의 031-749-8522 남한산성순교성지

이재훈 기자 steelheart@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