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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 역사이야기] (4) 한문서학서: 하느님 중국어로 말씀하시다

조한건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2000년 서울대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2012년
입력일 2021-05-11 수정일 2021-05-17 발행일 2021-05-16 제 3245호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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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 ‘기쁜 소식’ 널리 전파한 한문서학서
‘명말청초’ 시기 서양 선교사들 중국 고전 익혀 문서선교 시작
중국인 학자들 도움 받아가며 한문으로 수많은 서적 저술
「천주실의」 등 다양한 책들이 조선 학자들에게까지 전해져

“문장을 써 내는 것 자체는 큰 성취다. 하물며 평범하지 않은 중국어 책, 그것도 전국 열다섯 개 성에서 두루 통용되어야 할 책을 쓰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게다가 중국 서적은 일본, 조선, 베트남의 백성들도 읽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나라 문인들도 모두 중국 글자를 알기 때문이다…. 실정이 이러하다면, 우리가 쓴 책은 중국인만이 아니라 전체 중국 문화권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마테오 리치 「중국 선교사」 5부 2장 중에서)

■ 한문서학서와 문서선교

일반적으로 명말청초(明末淸初) 시기 중국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천주교를 전하는 동시에 서양 과학기술 등 서구문명을 전하기 위해 한문으로 엮어낸 서적을 가리켜 ‘한문서학서’라고 부른다. 당시 선교사들에 의해 저술된 서학서는 400~500여 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수도회 및 예수회의 선교활동 재개 이후 개항기까지의 서학서를 모두 포함하면 수천 권으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한문서학서를 보통 루지에리의 「천주성교실록」(1584)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일본에서도 교리서를 일역(日譯)하는 과정에서 이미 한문을 통한 선교가 시작됐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발리냐노-마테오 리치로 이어지면서 이른바 문화적응주의 방식인 한자를 통한 문서선교가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그렇다면 서양 선교사들은 한문을 어떻게 배웠고, 그토록 놀라운 한문서학서를 어떤 방식으로 저술했을까? 선교사들이 중동이나 인도에 도착해,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한자를 익힐 때, 중국어 알파벳은 이 세상 사물만큼이나 많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후와 음식, 언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중국 고전들을 익히면서 저술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저술 과정에서는 중국인 학자들의 도움이 컸다. 서광계, 이지조, 양정균 같은 관료학자들이 간행 비용은 물론 교정과 윤문을 해 주었다. 영혼론을 다루고 있는 「영언여작」의 경우는 삼비아시의 구술을 받아서 서광계가 작성했다. 마테오 리치 등 1세대 선교사들은 한자를 배우기 위한 한자병음(pin-yin) 방식, 방점 등을 사용했다. 그들이 ‘새들의 언어’라고 불렀던 중국어를 배우기 위해 사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성조 표기 및 색인 작업 등은 모두 예수회 선교사들이 시작했으며, 그들의 중국어 교재는 사서(四書)였다.

선교사들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는 중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처음에는 간접적으로 과학기술을 통한 관심을 유도하고, 유교의 상제(上帝) 개념을 하느님(Deus)과 대응시켜서 설명하고자 했다. 대표적인 저술이 「천주실의」였다. 주자의 성리학에 결여된 선진유학(先秦儒學)에는 상제를 통한 인격신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천주에 이 개념을 적용하고, 천주교에 결핍된 유교(儒敎)를 보완한다는 입장에서 ‘보유론’(補儒論)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선교사들은 그토록 넓은 중국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중국인 학자 관료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고, 일반백성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파되기를 희망했다. 더군다나 이웃 국가인 조선, 일본, 베트남 등의 한자문화권에도 문서선교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에서 서양 선교사들이 천주교를 전하는 동시에 서양 과학기술 등 서구문명을 전하기 위해 엮어낸 ‘한문서학서’들. 한문서학서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복음을 전파하는 문서선교의 도구였다. 조한건 신부 제공

■ 중국어로 복음을 보고 조선어로 복음을 말하다

문서선교에 대한 효과를 가장 직접적으로 받은 곳이 조선이었다. 조선의 학자들은 연행사(燕行使)를 통해 입수된 서학서들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과 천주교를 알게 됐다. 성호 이익과 같은 학자는 서양의 과학에 대해서는 “그 말에 이치가 있다” 혹은 “성인이 다시 태어나도 반드시 그것을 따를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칠극」에 대해서도 유교의 수양론보다도 더 깊이 나아간 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당지옥설 같은 경우는 유학에서 언급하지 않기 때문에, 불교의 별파 혹은 아류라고 하면서 배척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천주실의」에서 마테오 리치가 성리학을 비판했는데, 이학(理學) 지상주의였던 조선에서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이 주로 탐독하던 한문서학서는 1628년 이지조(레오)에 의해 간행된 총서 「천학초함」이었다. 이 총서는 이편(理篇)과 기편(器篇)으로 나눠져 있는데, 이편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천주실의」, 「칠극」, 「교우론」 등 종교, 윤리 관계 서적 10종이 수록돼 있고, 기편에는 「태서수법」, 「기하원본」 등 과학, 기술 관계 서적 10종이 모아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이승훈(베드로)의 세례와 더불어 평신도 신앙공동체로 시작한 한국천주교회는 성경과 기도서, 교리서 등 많은 한문서학서를 들여와서 복음을 보았고, 그것을 조선어로 번역하면서 전파했다. 따라서 한문으로 복음을 보고 조선어로 복음을 전파한 것은 문서선교의 도움이 컸기 때문에 가능했다.

■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봄에서 온다

한문서학서에는 우리 신앙 선조가 믿었던 복음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복자 정약종이 남긴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에서는 「천주실의」, 「성세추요」, 「성경직해」 등 수십 종의 한문서학서 내용을 인용한 흔적이 발견된다. 그 아들이었던 정하상의 「상재상서」에도 「진도자증」, 「칠극」 등 서학서에서 배운 신앙의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다. 예수님의 말씀이 복음이지만, 실상 그 복음말씀은 예수님 부활 이후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에 의해 문서로 전해졌고, ‘성령의 영감’을 받아 쓴 복음은 다시 새로운 언어로, 각 지방의 말로 번역, 전파됐다. 부활을 직접 본 제자들의 생생한 복음은 다시 선교사들에 의해 한문으로 전해졌다. 그 한문을 본 선배 신앙인들은 또 다시 생생하게 그 복음을 살아냈고, 우리에게 전수하고 있다.

사도행전에는 오순절 성령 강림 날, 불꽃 모양의 혀가 내려오고 흩어진 언어가 모두 자기 지방의 말로 들리는 체험을 전하고 있다.(사도 2,1-6) 교회는 그렇게 성령의 일치 안에서 하나로 탄생했고, 복음은 각 지방의 말로 전파됐다. 그런 점에서 아시아에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는 한문서학서였다. 아시아 역사 안에서는 한국 순교자들뿐만 아니라, 중국은 물론 한문문화권인 베트남, 일본, 그 외에 아시아 순교자들이 복음을 증언하고 있고, 그 시작점에는 한문서학서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한문서학서는 우리 선조들의 열정적인 신앙으로 아시아인들을 초대하고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

조한건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2000년 서울대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