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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시간을 걷다] (8) 최양업, 제작하다

이승훈 기자
입력일 2021-04-20 수정일 2021-04-20 발행일 2021-04-25 제 324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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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쉽게 노래처럼 교리 암송하도록 ‘천주가사’ 작성
교리 쉽게 풀어주는 내용으로 가사 양식 활용해 토착화 시도
간결하고 짧은 4·4조 구조
정말 최양업 작품인지에 대해 명확한 기록 남아있지 않지만 천주가사 통해 신앙선조들이 당시 지녔던 믿음 짐작 가능

어려운 것을 쉽게 외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노래로 외우는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구구단을 외우거나, 선조들이 어린 시절 「천자문」을 배우듯이 어린 아이들도 노래를 활용하면 어려운 내용을 쉽게 배울 수 있다. 신앙선조들이 교리를 배울 때도 이런 방법이 큰 도움이 됐다. 바로 천주가사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은 천주가사를 제작해, 어려운 교리를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도왔다.

■ 우리말로 더 쉽게 익히는 교리

“한글은 교리 공부하는 데 매우 유용합니다.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돼 있는데, 배우기가 아주 쉬워서 열 살 이전의 어린이라도 글을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 한글이 사목자들과 신부님들의 부족을 메우고 강론과 가르침을 보충해 줍니다. 쉬운 한글 덕분으로 세련되지 못한 산골에서도 신자들이 빨리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구원을 위한 훈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최양업은 1851년 10월 15일 스승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글이 전교활동과 교리교육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했다.

당시에는 박해로 신자임을 드러내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여러 선교사들을 비롯해 함께 수학했던 김대건까지도 순교해 사제들이 극도로 부족했다. 최양업과 여러 선교사들이 조선땅에서 활동했지만, 박해를 피해 산 속 여러 교우촌에 흩어진 신자들은 1년에 한 번 사제를 만나는 것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여기서 최양업이 주목한 것은 한글이었다. 일단 한글은 우리말을 사용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배울 수 있었다. 사제나 교리에 능통한 사람이 없이도 한글로 적힌 교리서를 읽으면 교리를 익힐 수 있었다. 실제로 최양업은 한글을 통한 교리 전파가 어떤 결실을 거두는지 직접 보고 체험하고 있었다.

최양업은 7번째 편지에서 바르바라라는 신자가 일상 기도문과 교리문답, 교리서, 성인전 등의 책을 암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5번째 편지에서는 “겨우 8, 9, 10세밖에 안 된 어린아이들이 교리문답 전체와 굉장히 긴 아침·저녁기도의 경문을 청산유수로 암송해 외우는 광경이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서를 암송하던 조선의 전통적인 공부방식이 교리교육에도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교리를 익히기 위해서는 이해할 것도 외울 것도 많은 반면, 교리를 이해하고 암기할 수 있도록 도울 사람은 적었다. 그리고 교리서의 수도 충분하지 않았다. 최양업은 1858년 작성한 편지에서 “예비교우들이 상당히 많아서 400명이 넘었으나, 영세자는 많지 않았다”면서 그 원인을 “사본문답(四本問答)을 완벽하게 익히지 못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사본문답은 「교리문답」 중 세례·고해·성체·견진성사에 관한 문답을 의미한다. 최양업은 “사본문답을 전부 배우자면 몇 해가 걸려야 하는 사람이 대다수”라며 “심지어는 죽을 때까지 교리 공부를 하여도 사본문답을 다 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에 최양업은 당시 조선 사회에서 많이 불리던 ‘가사’(歌辭) 양식을 활용해 누구든 우리말로 쉽게 노래처럼 암송할 수 있는 천주가사를 작성하게 된 것이다.

장인산 신부(청주교구 원로사목)는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에 대한 교부학적 연구」에서 “천주가사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암송하기에도 용이한 언문체 가사로서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영적 성장에 자양분이 되는 소중한 작품”이라면서 “최양업 신부는 한글 천주가사를 통해 교리의 토착화를 시도한 선구적 인물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천주가사 중 중요한 내용 대부분을 수록하고 있는 김지완본 「사주구령가」. 이 중 14편은 최양업 신부의 저작이고, 나머지 7편은 저작자가 분명치 않다.

울산대곡박물관 「천주교의 큰 빛 언양」 도록에 나와 있는 ‘사향가’.

■ 최양업이 쓴 천주가사

“영세 전은 마귀 종이/ 영세 후는 주의 의자(義子)/ 영세 전은 더럽더니/ 영세 후는 빙옥 같다/ 영세 전은 병든 영혼/ 영세 후는 병이 낫네/ 영세 전은 죽은 영혼/ 영세 후는 살아나네” - 천주가사 ‘영세’ 중

최양업의 천주가사는 4·4조의 간결한 구조를 취하고 있고, 비교적 짧은 구조로 구성됐다. 비슷한 구절을 반복하고, 서로 다른 부분을 대비하면서 어려운 교리를 쉽게 풀어 주는 형식이다. 천주가사에는 순교신심이나 성모신심, 찬미나 찬양 등 다양한 내용의 노래들이 있지만, 최양업의 작품으로 알려진 천주가사들은 모두 교리를 쉽게 풀어 주는 내용이다.

「최양업 신부 소작 천주가사의 목적과 특성」을 연구한 전남대 조지형(하상 바오로) 교수는 “당시 천주교회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인 신앙서 부족과 체계적인 교리교육 부재를 효과적으로 해결한 것이 바로 천주가사였다”며 “최양업의 작품들이 철저하게 교리 해설을 중심으로 짜여지게 된 것은 이러한 특수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설했다.

오늘날 최양업이 만든 천주가사 작품은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를 비롯해 칠성사를 노래하는 ‘영세’, ‘견진’, ‘고해’, ‘성체’, ‘종부’, ‘신품’, ‘혼배’와 향주삼덕을 노래하는 ‘신덕’, ‘망덕’, ‘애덕’이 있고, ‘칠극’, ‘제성’, ‘행선’ 등이 전해지고 있다.

물론 최양업의 작품으로 알려진 천주가사도 정말로 최양업이 직접 제작한 것인지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다. 천주가사가 신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필사본에 최양업이 저술했다고 적혀 있기는 하지만, 최양업 사후인 1886년 이후에 필사된 자료이기 때문이다. 구전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을 수도 있고, 다른 저자가 최양업의 권위를 빌리거나 최양업과 약간의 연관만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아쉽게도 최양업의 친저 여부를 분명하게 증명해 줄 다른 문헌적 근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실제로 최양업의 작품으로 알려졌다가 후에 여러 기록들이 연구되면서 만든 이가 다른 사람으로 밝혀진 천주가사들도 있었다.

다만 구전으로 전해진 많은 작품에는 저자가 명시돼 있지 않았음에도 신자들은 최양업의 작품만큼은 최양업이 저술했다고 기록했다. 그만큼 신자들이 최양업과 최양업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천주가사를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또한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이 천주가사들의 친저성과는 관계없이 천주가사 자체가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고 있고, 이를 우리 정서에 맞고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작품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이견이 없다. 천주가사가 반드시 최양업의 작품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천주가사를 통해 최양업이,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간 신앙선조들이 지녔던 깊은 믿음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김진소 신부(전주교구 원로사목)는 「천주가사의 연구」에서 천주가사는 문학적 개념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천주가사는 개인의 신앙고백이지만 모든 교회의 고백이기 때문에 가사의 참된 저자는 교회”라며 “작가의 표시가 없어서 작품의 가치가 감소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 최양업의 시간을 함께 걸을 수 있는 곳 – 배티성지

배티성지(충북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는 최양업이 1853년 여름부터 3년가량 사목 중심지로 삼아 머물며 활동하던 곳이다. 최양업은 이곳에서 전국 다섯 개 도에 흩어진 교우촌을 순방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특히 성지에는 ‘최양업 신부 박물관’도 있어 최양업의 삶과 신앙을 더 자세히 만나 볼 수 있다.

청주교구 배티성지 전경. 최양업 신부가 1853년 여름부터 3년가량 사목 중심지로 삼아 머물던 곳이다. 이곳에서 전국 다섯 개 도의 교우촌을 순방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