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고(故) 유승훈 프란치스코의 삶과 음악

김현정 기자
입력일 2021-03-23 수정일 2021-03-23 발행일 2021-03-28 제 3237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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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노래하고 싶었던 ‘찬양 사도’
가톨릭 생활성가 기틀 마련에 큰 몫
30년 동안 생활성가 한 길만 걸어
가수·기타 연주·프로듀서 등 활동

고인의 생전 활동 모습.

1990년대 초, 불모지에 가까웠던 한국 가톨릭 생활성가계에 씨앗을 뿌리고, 그 씨앗이 자라 풍성한 결실을 맺기까지 큰 역할을 한 가톨릭찬양사도협회 유승훈(프란치스코) 회장이 3월 9일 선종했다.

갑작스레 전해진 부고 소식에 많은 이들이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지만, 고인을 따르고 사랑했던 이들을 주축으로 그의 삶과 음악을 기억하는 움직임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마치 사자 갈기를 연상케 하는 긴 머리,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강하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 외에도 고인을 대표하는 것이 또 있다. 목발과 휠체어다. 생후 4개월 때 앓은 소아마비로 고인은 평생 목발과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지만 장애는 그에게 전혀 제약이 되지 않았다. 수 시간에 걸친 무대 공연도, 수십 시간이 걸리는 녹음실 작업도 척척 해냈던 그는 평소 입버릇처럼 “죽는 날까지 무대에 서고 싶다”고 말한 천생 음악인이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고인의 모습은 카리스마 넘치는 강한 외모와 달리 속마음은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고인과 20년 동안 친분을 이어온 가톨릭문화기획 imd 박우곤(알렉시우스) 대표는 “고인은 처음보는 사람은 접근하기 힘들다고 느낄 수 있지만 알고 보면 순수하고 착하고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이었다”라며 “자신이 가진 음악적 재능을 오로지 가톨릭 생활성가만을 위해 썼다”고 회고했다.

생활성가 음악인으로서의 삶은 절대 녹록지 않았다. 가수, 기타 연주자, 음악 프로듀서, 방송진행자로 다방면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펼쳤지만 돈을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음악만을 바라봐서인지 경제적인 어려움과 사람으로 인한 상처도 많이 겪었다. 하지만 그는 힘든 때도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한눈 팔지 않고 우직하게 생활성가 한 길만을 고집했다.

자신의 이익보다는 타인을 먼저 배려했던 삶을 살았기에 유튜브에는 고인을 기억하고자 하는 다양한 추모 영상들이 올라오는 한편, SNS에도 게시물과 댓글로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가톨릭찬양사도협회는 추모 공연과 추모 앨범 제작을 계획하고 있다.

김현정 기자 sophiahj@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