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생활 속 영성 이야기] (61) 상대방이 되어 주는 사랑

한준(요셉·한국CLC 교육기획팀장)
입력일 2021-03-16 수정일 2021-03-16 발행일 2021-03-21 제 3236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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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걸까?
예수님은 돈이나 명예, 권력 없이 두려움과 걱정, 번민을 가진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셨다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크게 되면 주는 것을 넘어 상대방 처지가 될 수 있음이 느껴진다
상대방이 되어 주는 사랑이다

십여 년 전 내가 한국 CLC(Christian Life Community) 부설 이주노동자인권센터에서 일하던 때였다. 작업 중에 팔을 심하게 다친 파키스탄 노동자 한 명이 있었는데, 회사에서는 이런저런 핑계로 산업 재해 신청을 하지 않고 그냥 병원비만 대 주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회사로 전화를 걸어 이런저런 사실들을 확인한 다음, 산재 처리를 부탁드렸다.

그리고 며칠 후 그 회사 대표와 직원 몇 명이 센터를 찾아왔다. 그분들에게 차근차근 설명하면 이해해 주실 것이라 기대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은 내 멱살을 붙잡고 심한 욕설을 해대기 시작했다. 나에게 상담을 핑계로 돈이나 뜯는 사기꾼이라 했다. 전혀 예상을 못 하기도 했고, 다른 동료들이 모두 출장을 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몹시 당황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경찰이 출동하고 나서야 상황은 종료되었다.

이때 받은 충격은 상당히 컸다. 분노와 함께 상담 일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당황하고 두려워했던 내 모습이었다. 부당한 폭력에 대해 당당하게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겁을 먹은 내 모습이 너무나 창피했다. 이주 노동자의 벗이 되겠다고 자처했던 활동가의 모습치고는 너무나 초라했고, 선의만 있으면 사람들에게 이해받고 존중받을 거라는 생각은 너무나 순진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마음이 안정되었고, 내 마음을 돌아보게 되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돕겠다고 했지만, 나 자신이 가난하고 소외되고 싶지는 않았다.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모욕을 당하는 이들을 돕겠다고 했지만, 나 자신이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모욕당하는 일은 절대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런 대우를 받는 이주 노동자들의 상황이 안타까웠지만, 나는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되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 발 멀리서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으로만 내 역할을 맡고 싶었는데, 그것이 무너지면서 내 안에 있던 두려움, 불안함, 비겁함, 오만함, 모순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마음이 복잡해지고 두려움이 커지면서 내가 사랑을 산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위선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좀 더 근사한 모습으로 오실 수도 있었다. 좋은 영성 강의를 통해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 활동도 하면서 존경받는 인물로 오실 수도 있었다. 사회 지도자층을 만나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모습으로 세상이 바뀌도록 개혁 방안을 논의하고, 세상 사람들의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는 시대의 어른으로서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돈이나 명예, 권력 없이, 두려움과 걱정, 번민을 가진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게다가 당신이 구원하고자 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버림받으셨다. 수난을 앞두고서는 당신께 주어진 잔을 거두어 달라고도 기도하셨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느냐고 하느님께 울부짖기도 했다.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그런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일까.

상대방에 대한 사랑이 크게 되면, 상대에게 무엇인가 주는 것을 넘어 그냥 상대방 처지가 될 수 있음이 느껴진다. 그냥 상대방이 되어 주는 사랑이다. 예수님은 두려움과 번뇌, 갈등을 똑같이 겪으시면서도 그런 당신을 하느님께 개방하고 간절히 기도하셨고, 하느님 안에서 용기와 희망, 위로를 찾는 모습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 주셨다.

예수님의 그 모습을 묵상하면서 내게도 많은 위안이 되었다. 사랑의 길을 감에 있어서 두려워해도 괜찮고, 비겁해도 괜찮다고, 도망가도 괜찮다고 하시는 것 같았다. 네가 알면 됐다고, 너를 변함없이 사랑한다고, 도망가더라도 다시 돌아오라고, 손을 놓지 말자고, 당신과 함께 다시 가자고 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완전해야만, 죄가 없어야만, 두려움이 없어야만 사랑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시면서도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같이 살자고 끊임없이 초대하신다. 있는 자리에서 겸손하게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도록 항상 애써야 하는 이유다.

한준(요셉·한국CLC 교육기획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