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576) 재의 수요일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21-03-16 수정일 2021-03-16 발행일 2021-03-21 제 3236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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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이 오기 2주 전부터 미사 후 공지사항 시간에 집에 있는 성지를 가지고 와서 뒤편에 마련된 수거함에 넣어 달라고 공소 식구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런데 성지가 2~3개 밖에 수거되지 않아, 그 전날 화요일 아침 미사 후에도 공소 식구들에게 다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오전까지는 성지를 꼭 가지고 오셔야 하는데요!”

그제야 어르신 한 분의 말씀,

“근디 집에는 성지가 없당께요. 작년에 거시기, 성지 주일, 그 미사가 여그 없었는디.”

‘아, 그렇구나’ 작년 성주간 때에 전국적으로 코로나19가 확산돼 각 본당마다 신자들과 함께 하는 미사를 봉헌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나는 공소 식구들에게,

“맞네요. 죄송해요. 내일 미사 때 사용할 성지는 저희가 잘 준비해 볼게요.”

그리고 그날 오후, 쌀쌀한 바람 속에 약간은 따스한 기온이 있어 책상에 앉아 나른함에 졸고 있는데 전례를 담당하고 있는 신부님이 내 방 문을 두드렸습니다.

“강 신부님, 잠시 들어가도 되나요?”

“그러셔요.”

방에 들어온 그 신부님 얼굴에선 허탈한 웃음이 보였습니다. 점심식사 후 화목 보일러 옆 담벼락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하고 계셨던 신부님 모습을 봤었는데, 그 사이 뭔 일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강 신부님, 이럴 때는 재미있다고 해야 하나, 씁쓸하다고 해야 하나….”

나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신부님의 얼굴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또 한 번 크게 한숨을 쉬던 그 신부님은 내게 말했습니다.

“작년에 주님 성지 주일 미사를 못해서 성지 수거가 어려웠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성지 몇 개는 구했는데요….”

“이야, 신부님 정말 수고하셨네.”

“그래서 내일 아침 재의 수요일 전례 때 쓰려고 좀 전에 성지를 잘 태웠거든요. 사실 이번 성지는 수거한 수가 적을 뿐 아니라 귀하게 모은 것들이라 화목 보일러 옆에서 가지가 마지막까지 잘 타서 하얀 재가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들였어요.”

“잘하셨네요. 그렇게 잘 태워 하얀 재가 돼야 신자들 머리에 얹을 때 좋지요.”

“그러게요. 그래서 재가 잘 타는 것을 본 후 사기그릇에 담으려고 하는데요, 그게… 에휴!”

그 신부님은 또 한 번 긴 한 숨을 내쉬었습니다. 나는 그냥 고개만 갸우뚱하는데,

“아니, 어쩜, 그런 타이밍이! 재를 그릇에 담은 후 일어서려는데, 하필 그 순간 쎈 – 바람이 담벼락을 타고 ‘휘이익’ 하며 불더니… 그만 재가 허공으로 다 날아가 버렸어요.”

순간 나의 웃음보가 터졌습니다. 그리고 그 신부님께 들은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는데…. 몇 개나마 성지를 어렵게 구했고 정성을 들여 잘 태웠는데, 그것을 그릇에 담아 일어서는 순간 바람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때맞춰 불어와 재를 다 날려 버렸다니! 푸하하하…!

“그래서 어떻게 했어?”

“찾아보니 다행히도 행렬용 십자가에 성지가 달려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것을 곱게 들고 바람이 전혀 없는 창고 안에 들어가서 잘 태웠죠.”

그 신부님 덕분에 머리에 재를 얹는 예식의 의미를 다시금 묵상하게 됐습니다. 사람에게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재’. 그러나 사람이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만 하고 삶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예식은 바람에 날아가 버린 ‘재’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를 얹는 예식을 준비하면서 ‘재’를 만들다가 그 ‘재’마저도 날려버리는 그분의 뜻 앞에서 그냥 웃기만 하면서도 왠지, 정신이 바짝 – 차려졌습니다.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