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세상살이 신앙살이] (575) 나의 계획과 하느님의 계획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입력일 2021-03-09 수정일 2021-03-09 발행일 2021-03-14 제 3235호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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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수도권 지역에서 생활하는 우리 수도회 형제들로부터 이곳, 고창 수도원을 방문해도 되겠느냐는 연락이 왔습니다. 한 분은 선배 신부님, 두 분은 후배 수사님이신데 1박 2일 정도 시간을 내어 여행을 계획했던 모양입니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형제들의 반응은 대환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짧은 일정으로 이곳을 다녀갔습니다.

모처럼 우리 수도원 형제들이 방문한다는데 ‘무엇을 할까’, ‘저녁과 아침은 무엇을 차릴까’. 함께 살고 있는 형제들은 머리를 맞대고 이것저것 계획을 짰습니다. 코로나19 방역 지침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야 했기에 선택의 폭은 넓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수도원 형제들이 고창 수도원에 와서 서울로 올라갈 때까지 ‘형제애’를 느끼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준비를 했습니다.

형제들은 차로 거의 4시간을 달려 낮 12시 즈음 도착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점심으로 뭘 먹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형제들은 백합 칼국수를 먹고 싶다고 했습니다. 실은 우리 계획은 동네에 굴밥을 잘 하는 집이 있어 그곳에 갈 생각이었지만, 방문한 형제들의 뜻에 따라 근처 바닷가 옆에 있는 식당에서 백합 칼국수를 먹었습니다. 싸고 맛있는 칼국수를 신나게 먹다보니 그 국물에 밥까지 말아 먹었습니다.

이어서 개갑장터성지로 가다가는, ‘복자 최여겸 마티아’가 천주교 신앙 때문에 체포돼 감옥살이를 했던 무장읍성에 들르게 됐습니다. 간단하게 산책 겸 주변을 둘러만 볼 생각이었는데, 형제들이 해설 안내를 받고 싶다고 해서 ‘관광 안내소’에 가서 해설 신청을 했습니다. 예약을 하지 않고 갑작스럽게 와서 신청한 터라 가능할까 싶었는데, 해설사 분은 무장읍성 전체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개갑장터성지로 갔는데 날이 너무 추워 우선 형제들과 따끈한 차를 마신 후 내가 나서서 성지 안내를 해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은 나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강 신부님, 지금 밖에 눈발이 세게 날리고 칼바람이 불어요. 신부님은 여기 계시고, 우리는 어차피 순례를 왔으니 십자가의 길도 바치면서 잠시 기도 시간을 가질게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성지에서 시간을 보낸 후 우리는 저녁 식사를 근처 식당에서 할 계획이었는데, 방문한 형제들은 그냥 고기를 좀 사서 수도원 식당에서 먹자고 제안했습니다. 덕분에 그날 저녁 땐 형제들 모두가 함께 식사 준비를 하고 함께 행복한 만찬을 나눴습니다.

그 다음 날! 새벽에 미사를 봉헌하고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는데, 또 예상치 않게 채석강과 내소사에 가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채비를 차리고 수도원 밖을 나왔는데 전날 꽤 많이 내렸는지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기대하지 못했던 눈 덮인 하얀 세상. 유난히 푸르른 하늘이 어우러진 고창 특유의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연을 만끽하면서 우리는 수다를 떨며 그렇게 오전 시간을 보냈습니다. 눈 내린 채석강. 매표소에서부터 내소사 대웅전까지 펼쳐진 흰 눈 가득한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사진도 찍었습니다.

무척이나 짧았지만 너무나도 마음 훈훈한 여행을 잘 마쳤고, 우리는 못내 아쉬웠지만 행복한 얼굴로 작별 인사를 한 후 각자의 사도직 현장으로 돌아갔습니다.

형제들이 가고 난 후 생각해 보니, 형제들을 위한 계획을 열심히 짰지만 그 계획대로 실행한 것은 하나도 없음을 알게 됐습니다. 모든 계획은 형제들과 웃고 떠들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왔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니 더 큰 행복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계획을 잘 준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함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어우러져 새로운 계획이 툭 - 튀어 나올 때, 그것 또한 잘 받아들이는 것도 또 하나의 인생 계획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강석진 신부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