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복음 뿌리내리고 교회 자립할 수 있는 토대 마련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는 방인사제 양성이 첫째 목표 현지 교계제도 정착시키고 복음의 토착화 위한 방안 유학 생활 난관 극복하고 첫 방인사제 된 김대건 신부 조선 입국로 개척에도 기여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를 부를 때 늘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邦人)사제다. 방인사제는 그 나라 출신의, 그 나라의 사제를 의미한다. 김대건 신부의 사제서품은 ‘김대건’이라는 개인의 사제서품 그 이상으로 방인사제 서품이라는 의미가 부각된다. 방인사제로서 김대건의 서품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 방인사제를 염원한 선교사들 “…이 모든 것이 방인사제를 더욱 필요하게 만듭니다. 신부님, 저는 방인사제 양성의 가능성을 가지고 싶습니다. 조선교회는 곧 방인사제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김대건의 서품식을 주례한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는 1844년 5월 18일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 선교의 어려움을 전하면서 김대건이 사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페레올 주교는 편지에 추신으로 교황청에 나이제한에 관한 관면을 받아서라도 김대건을 하루라도 더 빨리 사제로 만들고 싶은 심정을 전했다. 당시 김대건은 만 23세로, 사제서품 조건인 만 24세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희망. 사제 김대건의 탄생은 조선교회의 모든 신자들에게도 그랬지만, 선교사들에게도 간절한 염원이었다. 김대건과 최양업의 스승이기도 했던 매스트르 신부도 1844년 편지를 통해 “우리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방인사제 한 명을 만들고자 한다”면서 “그들(조선인 신학생들)은 천주께서 도와 주신다면 조선교회의 기둥들이 될 것”이라고 전한 바 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방인사제는 단순히 조선인이 서품을 받는 것 이상의 의미였다. 방인사제 탄생은 선교사들의 목적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회칙 1장에는 선교사들이 기울여야 할 노력의 우선순위를 정했는데, 첫째가 현지인 중 적합한 사람을 선발해 성직자로 양성시키는 것이고, 둘째가 새 신자들을 돌보는 것, 셋째가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회칙은 이 우선순위에 “둘째보다는 첫째가, 셋째보다는 둘째가 더 중요하다”면서 “우선순위를 절대로 뒤바꾸지 말 것”을 지시했다.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이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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